사무라이들도 직언 경청… 민심 이기는 권력은 없다[박훈 한국인이 본 일본사]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2024. 3. 28.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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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주가 직접 관리들을 만나 민심을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조슈번의 무사이자 사상가 요시다 쇼인(1830∼1859).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853년 7월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가 에도만에 나타났을 때, 조슈번사(長州藩士)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마침 공무로 에도에 와 있었다. 당시 23세. 집채만 한 시커먼 증기선이 연기를 내뿜고 쏜살같이 일본 해안을 휘젓는 걸 목도한 이 영민하고 야심만만한 젊은이가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번주에게 상서를 올렸다. 병학자였던 그는 함선, 총포, 마법(馬法) 등 군사 부문에 관한 대응 방안을 피력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맨 먼저 강조한 것은 ‘청정(聽政)’, ‘납간(納諫)’ 등 군주의 민심 수용이었다.》










언로 열기 시작한 위정자들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글씨가 담긴 각종 서찰과 문서. aucfan 홈페이지 캡처
당시 번주(藩主)들은 의례나 유흥을 일삼으며 정무는 몇몇 대신들에게 맡기는 게 통례였다. 쇼인은 번주가 오전 7시부터 11시까지 직접 회의를 주재해 하급 관리나 지방관리의 말도 직접 들어보고, 상서는 그 자리에서 개봉하여 열람하라고 촉구했다. 상서에 볼 만한 점이 있으면 쓴 사람을 직접 만나 끝장토론을 벌이라고도 했다. 특히 직간(直諫), 즉 신하가 주군 면전에서 간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는 “근래 직간하는 풍조가 사라지게 된 것은 나라가 쇠퇴해 가는 징조로 실로 탄식할 만하다”고 전제한 후 주군이 언로를 활짝 열어,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는 자가 있으면 심야라도 만나줘야 한다고 했다. 예로부터 직간은 전쟁터에서 적진에 제일 먼저 뛰어드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이라는 걸 인정하면서, 주군이 아무리 직간을 권장하더라도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모두가 입 다물고 면종하는 사람들만 있을 것이니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急務條議’)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미토번(水戶藩)에서는 번주 자신이 민심 수용을 주도했다.(박훈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명군으로 회자되던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는 취임 직후 언로 개방을 선언하며, 말단 관리까지 직접 불러 민정(民情)을 탐문했다. 이에 긴장한 대신들이 관례에 없는 일이라며 말리자, “무릇 내 신하는 내외, 대소 없이 모두 하나다. 만약 물을 일이 있으면 비록 보졸(步卒)이라 할지라도 부르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는가”라고 일축했다. 그 장면을 하나 소개한다. “(나리아키가) 복도에서 정원으로 내려가 쪽문을 지나 마루로 올라가셨다. 주위 사람을 물리친 후에 모토지메(元締·향촌관리)들이 어전에 와서 엎드리자, 번주께서 향촌의 일에 대해 여러 가지로 물어보셨다. 마실 것도 주시고 두 종류의 술잔에 직접 술을 하사하시었다.” 향촌 관리들이 감격하여 심기일전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미토번주, 직접 순행에 나서다

번을 지배하는 제후인 번주(藩主)가 수행원들과 함께 이동하는 모습을 그린 19세기 삽화. 이처럼 번주가 행차할 때는 수백 명에 이르는 인원이 동원되는 게 보통이었지만, 미토번의 번주인 도쿠가와 나리아키(1800∼1860)는 단 10여 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백성들을 직접 만났다. 그는 향촌관리들을 직접 만났을 뿐 아니라 농촌을 찾아가 농민의 집을 직접 방문하고 글씨를 하사하기도 했다. 일본의 근대 개혁인 메이지유신은 민심을 들으려 한 이런 위정자들의 노력에서 싹텄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에도-도쿄 박물관 컬렉션 홈페이지
나리아키는 관리를 두루 만나는 데 그치지 않고 백성과 직접 접촉하려 했다. 순행(巡行)이다. 고산케(御三家)로 쇼군(將軍)의 가장 가까운 친척 중 하나인 미토번주는 자기 영지에 있지 않고 에도에서 쇼군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래서 ‘천하의 부장군(副將軍)’이라 했다. 그러나 나리아키는 15년 재임 기간 동안 3분의 1을 미토에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미토 농촌을 4번 시찰했는데 그 행보가 자못 파격적이다. 번주가 지방을 행차하면 수행원 400∼500명 동원되는 게 보통이었지만, 그의 순행에는 달랑 17명 정도가 동행했다. 순행 행차는 모두 간소화해서 주먹밥을 갖고 다니며 해변을 지날 때는 모래사장에서 점심을 때우기도 했다. 농민의 집을 방문하여 하오리(羽織) 등을 하사하거나 글씨를 써서 사인을 한 뒤, ‘아무개에게’라고 받는 사람의 이름을 직접 적어주기도 했다. 자기 이름이 적힌 번주의 글씨를 받아 든 이 농민의 심정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한번은 향촌의 유력자 집을 방문하려고 하자, 그 사람이 놀란 나머지 너무 누추하니 다른 곳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그러자 나리아키는 “그런가, 그렇다면 오히려 들러보고 싶군”이라며 기어이 찾아갔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집은 많이 파손되어 있었다. 문자 그대로 ‘민폐(?)’다. 그러나 민중들은 이런 나리아키를 ‘미토노공(水戶老公)’이라 부르며 흠모했다. 요시다 쇼인도 앞에 인용한 상서의 맨 첫머리에서 조슈번주에게 ‘미토노공’과 잘 사귀어 두라고 할 정도였다.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보면 민심에 이러저러한 파이프를 대고 선제적으로 대응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公議輿論’)


동아시아 ‘민심주의’ 전통

동아시아 역사에 민주주의는 없었지만, ‘민심주의(民心主義)’의 강력한 전통이 있어 왔다. 순종적인 일본인들이 저럴진대, ‘소용돌이의 정치’를 자랑하는 한국의 민심 파워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무릇 군주란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한국의 민심은 사납고 무섭고 전광석화 같다. 그간 배가 뒤집히는 것도 많이 봐왔다. 민심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오늘 칼럼을 끝으로 붓을 잠시 놓으려 한다. 일본사를 주제로 3년이나 써왔다. 아마 일본 신문에 한국사 칼럼을 3년간 연재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무모한(?) 기획에 지면을 내준 동아일보에, 그리고 낯선 내용을 진지하게 읽어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한국은 해방 후 80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세계가 경탄할 만한 성취를 이뤘다. ‘한국혁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변화가 일어났고, 그 결과 한국은 2차 대전 후 독립한 150개 국가 중 유일한 선진국이 되었다. 모든 분야가 변했고 성숙해졌다. 그런데 딱 한 군데 변하지 않은 분야가 있다. 바로 일본에 대한 인식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는 1000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거나 ‘다시는 지지 않겠습니다’는 말이 일국의 대통령들 입에서 나올 정도였으니 일반 시민은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지금은 식민지 시대도, 해방 직후도, 그리고 후진국이던 때도 아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일본을 대하는 것은 선진국 시민의 품격이 아닐 것이다. 이제는 있는 그대로, 불편한 사실도 당당하게 직시하며, 거기에 기반하여 선진국에 걸맞은 새로운 역사상을 수립해야 할 때다.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차라리 냉전 시대가 평화로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안과 공포가 늘어나고 있다. 세계가 불안하게 지켜보는 곳은 우크라이나, 중동, 대만, 그리고 불행하게도 한반도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역사 인식, 자기 인식만이 이 난세에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진지(陣地)다.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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