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항일 노래한 ‘박동실 열사가’로 문화재 되는 게 꿈

정대하 기자 2024. 3. 28.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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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4대째 판소리맥 잇는 정순임 명창

핏줄에 의한 소리맥을 4대째 잇고 있는 정순임 국가지정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 정대하 기자

“엄마가 이걸 자른 거요. 여성국극단 다니실 때 아쟁이 너무 기니까 잘라서 개량을 한거지요.”

지난 22일 오후 경북 경주시 서부동 경주무형문화재 전수관 1층에서 만난 정순임(82)씨는 유리 전시관에 놓인 개량 아쟁을 가리키며 ‘엄마’ 이야기부터 했다. “내 어머니라서가 아니라, 예술 계통으로 나와보니 과연 우리 어머니처럼 천재적인 예술가가 없더라, 이 말이야.”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2020)인 정순임은 4대째 핏줄에 의한 소리맥을 잇고 있는 명창이다.

개량 아쟁 옆 사진 속엔 그의 어머니 장월중선(1925~98)이 햇살처럼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리하고 있다. 판소리와 무용, 기악 연주, 작곡에 능했던 예술인이었다. 그는 “엄마는 소리면 소리, 무용이면 무용, 악기도 거문고, 가야금, 아쟁, 양금을 다하셨다. 아쟁 산조도 처음으로 작곡했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경북 경주시 서부동 경주무형문화재 전수관 2층 전승교육실 안에 있는 장판개 명창(왼쪽)과 장월중선 명창의 사진. 정대하 기자

전수관 2층 판소리 전수교육실로 들어서니, 오래된 흑백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정순임의 큰외조부 장판개 명창이다. 장판개(1985~1937) 명창은 1904년 7월 고종 앞에서 장기인 ‘적벽가’를 불러 신묘한 소리로 좌중을 혼취케 해 벼슬을 받았던 ‘어전광대’였다. 장판개의 아버지 장석중도 거문고 명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장판개 집안을 ‘판소리 명가1호’(2007)로 지정했다. 장석중-장판개-장월중선-정순임으로 4대째 소리의 맥을 이어온 것에 대한 헌사다.

광주광역시 태생인 정순임은 경주와 인연을 맺은 지 50여년이 됐다. 어머니 장월중선은 한국전쟁 때 목포 인근 섬으로 피난을 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뜬 뒤 목포 유달산 아래 건물의 방을 빌려 국악원을 설립했다. 정순임은 어머니한테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유관순 열사가’ 등을 배워 여성국극단(1956~57)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정순임은 1963년께 대구로 갔다. 재즈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외삼촌이 살던 대구로 간 어머니의 권유 때문이었다.

정순임 명창이 제자들과 환하게 웃고 있다. 정대하 기자

장월중선은 1963년 경주 관광요원교육원이 문을 열자 강사로 갔고, 정순임도 조교로 일했다. “대구는 그때도 판소리를 하면 굉장히 좋아해요. 그런데 경주는 판소리로는 불모지야.” 천년고도 경주는 20세기 초 기생조합인 경주권번에서 호남 출신 명창들이 기생들에게 소리를 가르쳤다. 1922년께 장판개 명창도 경주권번 소리 선생을 했다.(김석배 ‘20세기 경주지역의 판소리 문화 연구’) 하지만 1960년대는 새로운 대중문화의 유입으로 판소리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국악과 전통예술에 대한 관심이 멀어졌을 때였다.

장석중·장판개·장월중선 이어
4대 120년 동안 우리소리 지켜
2007년 판소리명가 1호로 지정
1963년 판소리불모지 경주로 가
모친 조교 노릇하며 판소리 전수
85년 남도예술제 대상 받으며 이름

“박동실, 해방 후 열사가 작창할 때
제 모친 앉혀 놓고 기억하도록 해”

1966년 12월 설립된 경주시립국악원 강사로 초빙된 장월중선은 그 직후 신설된 광주시립국악원의 강사 임명장을 받았다. 하지만 학생들이 “샘요, 가지 마이소. 우덜은 누구한테 배웁니꺼? 우덜은 누구한테도 못가니더”하며 울고불고하는 바람에 광주고향행을 포기했다.(김수미 ‘예성 장월중선의 생애와 예술’ 중) 장월중선은 1981년 신라국악예술단을 설립해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경주 국악계를 이끌었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9호 가야금 병창 예능보유자(1993)가 됐다. 주영희·임종복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가야금병창 제19호 모두 장월중선의 제자다. 정순임은 “어머니 조교 역할을 하며 도왔다. 소리로 문화재가 되셨어야 할 분이었는데 아쉽다”고 했다. 정순임의 조카 정성룡은 동국대 국악과를 졸업한 뒤 그에게 소리를 배우고 있다. 5대째다.

정순임 명창은 지난 22일 인터뷰를 하다가 심청가와 열사가, 적벽가 한 대목씩을 불렀다. 그는 타고난 목구성으로 상청에서 하청까지 균형잡인 소리를 한다. 70년 예인 관록이 묻어 있는 소리다. 정대하 기자

정순임은 남도예술제 판소리 특장부 대상으로 대통령상(1985)을 수상하며 국악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국립창극단에 들어가 9년간 활동하다가 다시 경주로 갔다. 그 때 국가지정무형문화재 흥보가 예능보유자 박송희(1927~2017) 명창을 만나 흥보가를 배웠다. 그는 “여기 이수증을 봐요. 내가 선생님의 1호 이수자예요”라며 스승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네바탕을 다하고 적벽가 주요 대목도 하는 정순임은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한테 배운 박동실제 심청가가 애잔해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정순임에게 또 하나 중요한 책임은 열사가의 전승이다. 열사가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등 다섯바탕 외에 새로 만든 창작 판소리다. 해방 후 박동실(1897~1969) 명창이 이준, 안중근, 유관순, 윤봉길 열사 등의 항일 행적을 노래한 열사가가 대표적이다. 대중가요 ‘하얀나비’의 가수 김정호의 외할아버지인 박동실은 한국전쟁 때 월북해 그의 심청가가 제대로 전승되지 않고 있다. “박동실은 열사가를 작창하면서 녹음 장비가 없을 때라 기억력이 좋은 장월중선을 옆에 앉혀 놓고 전수해 기억하도록 했다.”(김수미 박동실제심청가보존회장) 정순임은 “내 제자들에겐 심청가와 열사가를 꼭 가르친다. 열사가로 문화재가 되는 게 마지막 소망이다”라고 강조했다.

생전 딸에게 더 엄격하고, 칭찬이 인색했던 장월중선은 언젠가 ‘유관순 열사가’를 완창한 ‘제자 정순임’에게 툭 한 마디를 던졌다. “내 딸이지만 소리 참 잘~헌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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