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 말고 시계 같은 공약 [슬기로운 기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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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의 '빅 이벤트' 중 하나는 반장 선거였다.
요즘은 반장을 어떻게 정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 다녔던 초·중·고등학교에선 반장을 하고 싶은 친구들이 손을 들어 입후보하고, 한명씩 교단에 나와 공약을 말하면 학생들이 투표하는 식으로 운영됐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을까, 반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던 아이 한명이 손을 들고 반장 선거에 입후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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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지민 | 인구복지팀 기자
학창 시절,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의 ‘빅 이벤트’ 중 하나는 반장 선거였다. 요즘은 반장을 어떻게 정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 다녔던 초·중·고등학교에선 반장을 하고 싶은 친구들이 손을 들어 입후보하고, 한명씩 교단에 나와 공약을 말하면 학생들이 투표하는 식으로 운영됐다. 매 학기 4∼5명 정도가 선거에 나왔는데 공약은 늘 뻔했다.
장난기가 많은 친구는 선거보단 교단에서 아이들을 웃기는 데 관심이 많았고, 누군가 햄버거를 쏘겠다고 약속하면 다른 누군가는 피자를 쏘겠다며 경쟁하곤 했다. 새 학년이 개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다 보니, 전교에서 친구가 많은 인기 학생이 “열심히 하겠다”는 한마디를 던지고 당선되는 모습도 흔했다. 당연하게도 아이들은 공약의 내용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반장 선거는 사실상 인기투표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을까, 반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던 아이 한명이 손을 들고 반장 선거에 입후보했다. 앞선 후보들은 역시나 각오 한마디와 함께 “햄버거를 쏘겠다”는 공약을 읊은 참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공약으로 “교실에 시계를 사 오겠다”고 약속했다. 순간 교실이 웅성거렸다. 그 당시 우리 반에는 다른 반에 다 있는 벽걸이 시계가 없었다. 수업 중엔 ‘언제 종이 치나’ 시계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이 낙이었기에, 반에 시계가 없는 생활은 상당히 불편했다. ‘유권자 맞춤형’ 공약 덕분인지 그 친구는 햄버거와 피자 공약을 누르고 압도적인 결과로 반장에 당선됐다. 반장 선거 다음날, 드디어 우리 반엔 벽걸이 시계가 생겼다.
2020년 총선, 2022년 대선에 이어 선거철 유권자 민심을 취재한 건 이번이 세번째다. 지역개발과 저출생에 대한 민심을 집중적으로 취재했는데, 4년 전보다 더 무심해진 분위기가 느껴졌다. 4년 전 총선 당시 길거리에서 이번 총선에 바라는 점을 스케치북에 써달라고 요청했을 땐, 정치 얘기에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수줍게 한두마디 적어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올해 취재를 나갔을 땐 총선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꺼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매번 비슷한 공약은 있었죠”, “(원하는 공약) 딱히 없는데요. 공약은 말 그대로 공약이고…”, “뭐, 그런 정책들이 없는 것보단 낫겠죠?”, “10년 전에 말한 것도 아직 안 이뤄졌는데 뭘…”. 비혼·비출산을 결심한 한 유권자는 몇가지 저출생 공약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다가도 ‘공약이 잘 실현된다면 아이를 낳을 생각이 있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런다고 마음이 1㎝에서 10㎝로 확 움직이지 않아요. 1㎝에서 1.2㎝가 될까 말까인 거지.” 유권자들은 늘 차가웠다지만 해가 갈수록 체념과 정치 냉소가 심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잠깐 혀를 즐겁게 할 햄버거 같은 공약으론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 보수와 진보,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정당들의 공약이 어째 당선되면 한턱 쏘겠다며 피자냐, 햄버거냐를 내걸고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교실에 무엇이 부족한지 살피고 가장 필요한 시계를 공약으로 내걸어서, 실제로 재정을 투입해 이를 마련하고, 1년 내내 시계 덕에 편하게 생활할 수 있게 만들었던 그런 공약이 없다는 게 아쉽다. ‘시계를 사 오겠다’고 하자 웅성거렸던 반 아이들처럼 유권자들도 그런 공약이 나온다면 선거를 다시 보지 않을까.
sj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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