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공화국’, 선거는 생존 투쟁이다 [강수돌 칼럼]

한겨레 2024. 3. 28.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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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에 탄생한 지금의 ‘검찰공화국’은 군사독재 대신 검찰독재를, 물리적 폭력 대신 법리적 폭력을 예사로 행한다. 문재인 정부가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을 시대적 과제로 삼고 본격 실행에 착수하자 (마치 영화 ‘내부자들’처럼) ‘검찰-언론-재벌-수구 카르텔’이 전면 역공을 가했다.

강수돌 |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습니다.” 1987년 1월,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22살 대학생 박종철이 극심한 물고문에 생명을 잃었다. 이에 당황한 경찰의 발표가 ‘단순 쇼크사’란 것!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어찌 손바닥으로 가리랴?

2017년 연말,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은 바로 이 폭력과 거짓을 기반으로 한 군사독재정권의 실체와 그 참혹한 현실에서도 용감하게 행동한 양심을 다뤘다. “독재 타도!”를 외치며 목숨을 바친 이들은 학생만이 아니었다. 이미 1970년의 전태일이나 1980년의 광주 시민들이 상징하듯, 수많은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 장애인, 학생 등 역사에 부끄럽지 않으려던 이들이 나섰다. 그렇게 고인이 된 분들이 지금 광주 망월동에, 경기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 경남 양산 솥발산공원에 계신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는, 그게 아무리 우리 기대에 못 미쳐도, 숱한 희생과 투쟁의 산물이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는 또다시 같은 역사를 겪을 것”이라는 조지 산타야나의 말을 상기하자. ‘기억투쟁’의 중요성이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역사를 망각한 탓일까? 2022년에 탄생한 지금의 ‘검찰공화국’은 군사독재 대신 검찰독재를, 물리적 폭력 대신 법리적 폭력을 예사로 행한다. 문재인 정부가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을 시대적 과제로 삼고 본격 실행에 착수하자 (마치 영화 ‘내부자들’처럼) ‘검찰-언론-재벌-수구 카르텔’이 전면 역공을 가했다. 이른바 ‘조국 사태’는 바로 이 맥락이었다. 그 외 ‘고발 사주’와 증거인멸, 검찰 특수부의 국가기관 및 개인 정보 장악, 심지어 ‘정직한’ 검사 배제, 시민에 대한 ‘입틀막’ 사태, ‘도주 대사’와 ‘대파 파동’은 모두 검찰독재의 방증이다. 이 ‘어마무시한’ 검찰공화국에 비하면, 김건희나 최은순의 행적들은 차라리 ‘새 발의 피’다.

이 상황에서 우리에게 과연 ‘선거’란 무엇인가? 좀 식상한 질문이지만 하나씩 따져보자.

첫째, 당장 검찰공화국을 민주공화국으로 만들 ‘현실적’ 통로가 곧 선거요 투표다. 물론, 나는 선거나 대리인을 통한 민주주의(?)에 대해 늘 경계한다. 민주주의란 원래 민중의 자기 통치이기 때문! 그러나 ‘당장’ 굶어 죽기 직전의 거지에게 빈곤의 근본 원인을 묻는 게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근본’ 토론과는 별개로 우선은 유권자 ‘모두’ 투표장에 가자. 코앞의 검찰독재 종식이 단 하루만의 투표로 가능하다면, 이 정도 ‘가성비’는 괜찮다!

둘째, 민중의 대리자랍시고 나선 후보 중 사실상 민중의 지배자 내지 수탈자들이 많기에, 이들을 공적 정치의 장에서 내쫓는 수단이 투표다. 투표란 누군가를 뽑는 일임과 동시에 누군가를 ‘뽑지 않는’ 행위다. (매년 600조원 이상 민중의 혈세와 재정을 놓고) 민중에 봉사하기보다 민중을 봉으로 삼는 자들을 ‘뽑지 않음’으로써 축출해야 한다. 이를 통해 정직하고 지혜로운 이만이 공적 정치의 장에 나설 자격이 있음을 알려야 한다.

셋째, 선거는 참여 민주주의의 훈련 과정이기도 하다. 다각적 참여로 상식이 통하는 공적 분위기를 조성하자. 그래야 비로소 우리가 사회경제 불평등, 공동체 해체, 기후위기, 6차 대멸종, 생태 민주주의 등 좀더 근본적 문제를 토론하고 해법을 모색할 수 있다. 선거라는 공적 공간은 사적 이익을 위한 비즈니스 공간으로 오남용되기 일쑤다. 그들 뒤엔 자본 진영이 물심양면 지원한다. 이는 마치 미국(자본)이 그 정치경제적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선거 과정에 개입하는 것과 같다. 사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공적 공간을 다 내준 상태에선, 자유도 평등도 민주도 요원하다. 참여가 희망이다!

솔직히, 나는 한동안 투표와 선거는 ‘가진 자들(엘리트)의 잔치판’이라 봤다. ‘그놈이 그놈’이었기에!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다.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나 혼자 잘난 척’해봤자 공적 정치의 공간을, 그리하여 정치·경제, 사회·생태, 교육·종교 등 삶의 전 영역을 자본과 권력에 넘겨주고 만다는 것을 절감한다. 최근에 만난 한 친구도, “내가 지난 대선 국면에서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면 결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라며 깊이 자탄했다. 진심으로 공감했다. 최선이 아닌 차선을,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 정치다. 풀뿌리 생활 정치가 근본이지만, 선거 정치도 무시할 순 없다.

그러나 늘 ‘현실’ 적응만 하면, 선거 이후 또 ‘그놈이 그놈’ 되는 현실이 반복될 것이다. 현실에서 출발하되, 몸부림을 치면서 ‘새 현실’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치열하게 공부하고, 토론해야 한다. 인문학 공부가 절실한 이유다. 특히 ‘자본주의’를 제대로 공부할 필요가 있다. 비판적 성찰이 돌파구를 연다. 그렇게 인문학, 사회과학, 생태학까지 두루 배우고 행해야 한다. 이런 과정이 동반되지 않은 채, 선거 뒤에 아무 생각 없이 일상으로 복귀하고 또 그렇게 몇년 보낸 후 상투적 투표만 반복한다면 우리는 늘 ‘그 모양 그 꼴’(노동자, 소비자, 납세자, 투표자)로 허송세월하게 된다. 아니, 그냥 허송세월이 아니라 세상을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하게 만들고 끝장난다.

이런 점에서 선거 정치에만 갇힌 우리의 혼을 번쩍 깨우는 경고에 귀 기울여 보자. 약 140년 전, 프랑스의 비판적 지식인 옥타브 미르보는 이렇게 말했다. “양들을 보라. 그들은 도살장으로 간다. 아무 말도 없고 아무 기대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죽일 도살자를 위해, 나아가 자신들을 맛있게 먹을 부르주아를 위해 투표하진 않는다. 이에 비하면 오늘날 유권자들은 가축보다 더 우둔하고 양보다 더 양 같다. 이들은 자신을 죽이는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고 자신을 지배하는 부르주아를 굳이 선택한다.”(안젤름 야페, ‘파국이 온다’)

못 배움 자체보다 배운 자의 어리석음이 더 무섭다. 자기 몸을 집어삼키는 뱀 같은 ‘식인 자본주의’가 사태의 몸통이긴 하지만, 그 몸통을 계속 유지시키는 건 ‘무비판적 동조’라는 어리석음이다. (역사를 망각한 채) 또 이 어리석음을 반복할 것인가? 지난 2년도 힘들었는데 ‘또 3년’은 너무 길다. 그래서 일단 살아야 한다. 선거도 투쟁이다. 당신의 현명한 한 표가 우리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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