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 인문사회과학서점, 마을책방이 되다 [전범선의 풀무질]

한겨레 2024. 3. 2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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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해방촌 마을책방으로 다시 문을 연 ‘풀무질’. 이승찬 제공

전범선 |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성균관대 앞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을 인수한 지 어느새 5년이 되었다. 팔구십년대에는 대학가에 서점이 많았다. 그중 인문사회과학서점은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민주, 평화, 통일을 꿈꾸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천년대 들어 하나둘 사라지더니 결국 서울대 앞 그날이오면, 성대 앞 풀무질만 남았다. 2019년 1월, 나는 정신을 계승할 청년을 찾는다는 은종복 대표님의 이야기를 한겨레 지면으로 읽고 풀무질을 찾아갔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 자리에서 5년을 버텼다. 그러나 올해 초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가 상권이 몰락했다. 성대뿐만 아니라 신촌, 이대, 홍대, 건대 등 대표적인 대학가 상권이 전부 코로나 이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비대면 교류에 익숙해지면서 청년들이 대학가를 찾지 않는 것이다. 식당, 카페도 힘든데 책방은 말할 것도 없다. 대한민국 성인 중 절반 이상이 1년에 책을 한권도 안 읽는다. 디지털 원주민인 엠제트 세대는 책보다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습득한다. 특히 이십대는 지난 10년 새 독서량이 반토막났다. 대학가 인문사회과학서점은 지속 불가능하다.

풀무질이 살아남은 것은 비건 커뮤니티 공간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내가 몸담은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이 풀무질 이층으로 2021년 이사했다. 비거니즘 출판사 두루미를 통해 계간지 ‘물결’과 ‘비건 세상 만들기’, ‘왜 비건인가?’ 등 단행본을 출판하고 읽기모임, 북토크, 세미나 등을 꾸준히 개최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에게 안전한 보금자리로서 풀무질을 가꾸었다. 후원회원과 단골의 도움으로 근근이 책방을 유지했다. 책을 파는 게 아니라 가치를 나눴고, 매장이 아닌 사랑방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결과 자리를 지키는 것은 성공했으나 더는 성대 앞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시대정신이 바뀌기도 했다. 운동권 대학생들이 노동해방, 민족해방, 민중해방을 외치다 진압대를 피해 책방에 숨어드는 시절은 지났다. 선배가 후배를 의식화하려고 책방에 데려와 불온서적을 사주는 시절도 아니다. 여성해방, 퀴어해방, 동물해방을 외치는 청년들이 모이기는 하지만 대학이 아닌 온라인 커뮤니티로 조직된다. 대자보 대신 소셜미디어, 선배 대신 인플루언서를 따라 의식이 형성된다. 책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명제는 오늘날 과연 유효한가? 사회운동의 아지트로서 책방이 여전히 필요한가? 나는 치열하게 고민했다.

종이책에 대한 낭만은 진작에 버렸다. 물론 나는 여전히 종이책을 사랑한다. 그 촉감과 향기를 대체할 수 없다. 하지만 전자책도 즐겨 쓴다. 디지털 혁명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은 지는 싸움이다. 엠제트와 다르게 알파 세대는 종이책에 대한 향수조차 없을 것이다. 스트리밍의 시대 바이닐이 갑자기 재유행하는 것처럼 종이책도 미래에 재조명받을 수는 있으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도서 출판을 그만두고 소셜미디어 콘텐츠 제작에 집중하기로 했다. 사업뿐 아니라 운동을 위해서도 그것이 바람직했다.

그렇다면 책방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지난 5년을 되돌아보며 풀무질이 무엇을 남겼는지 스스로 물었다. 사람, 사람, 사람밖에 없었다. 몇몇 강아지와 고양이도 떠올랐다. 참 많은 이들이 왔다 갔다. 웃기도 했지만 많이 울었다. 기후를 걱정하며, 동물을 애도하며, 차별에 분노하며 많이 울었다. 그러다 친구가 되고 동지가 되고 도반이 되었다. 부부가 된 이들도 있다. 나는 돈은 못 벌어도 사람은 벌었다. 식구가 늘고 살림이 커졌다. 사상의 불을 지피는 책방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생명의 불씨를 살리는 배움 공동체로 진화했다.

바로 오늘, 풀무질이 용산구 해방촌 마을책방으로 다시 문을 연다. 동물해방물결도 이층으로 같이 이전했다. 신흥로 82 건물 전체를 해방촌 마을회관으로 명명했다. 말하자면 비건이라는 키워드에 로컬을 더했다. 다문화 예술마을 해방촌의 정주인구와 생활인구가 모두 자유롭게 드나드는 커뮤니티 센터로 발돋움한다. 해방촌이라는 멋진 이름만큼 해방적인 마을책방, 마을회관이 될 것이다. 1985년 처음 문을 열었으니 풀무질은 올해로 마흔 살이다. 불혹의 나이에 걸맞게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때다. 은종복 전 대표님은 내게 책방을 물려주며 말했다. “온 세상 아이들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는 세상을 만들어요.” 해방촌 풀무질이 그러한 해방 세상의 주춧돌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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