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전 ‘소작료 4할’ 쟁취한 암태도 소작쟁의 주역

한겨레 2024. 3. 28.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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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농 서태석, 이십대에 전남 신안 암태도의 면장이 됐다.

1924년 3월27일, 서태석은 문씨 지주 집안으로부터 테러를 당한다.

서태석은 옥살이를 했지만 소작인들은 소작료 4할을 쟁취한다.

풀려난 뒤 1930년대 후반부터 서태석은 정신질환으로 고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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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다] 서태석 (1885~1943)

자작농 서태석, 이십대에 전남 신안 암태도의 면장이 됐다. 젊은 나이에 지역의 유지다. 지주 문태현의 송덕비를 세웠다. 1919년 3·1운동 때는 손 놓고 지켜만 보았다.

어떤 계기였을까. 서태석은 안락한 삶을 내던진다. 1920년에 3·1운동 일주년 시위를 준비하다 붙잡혀, 고문당하고 옥살이한다. 출옥한 뒤 좌파운동가로 거듭난다. 독립운동을 한다며 좌파운동을 한다며 뭍으로 나가 두차례 더 체포된다. “젊어서 사회주의를 하다가 나이 들어 변절하는 사람이 많다. 서태석은 그 반대였다.” ‘서태석 평전’을 쓴 박남일의 지적이다.

1923년에 암태도로 돌아온다. 자작농 집안의 그가 소작쟁의를 이끈다. “소작료 4할”을 요구한다. 1924년 3월27일, 서태석은 문씨 지주 집안으로부터 테러를 당한다. 그쪽 사람들이 그를 때려죽이려 했다. 3월28일 소작인들은 문태현 송덕비를 뽑아버린다. 지주 쪽에서 자기네가 피해자라 주장해 서태석과 지도부가 일본 경찰에 잡혀간다.

그가 구속된 동안 소작쟁의는 자작농 박복영이 이끈다. 암태도 사람 수백명이 ‘아사동맹’을 조직해, 뭍으로 나가 서태석의 석방을 위해 농성한다. 여성 농민 고백화는 외쳤다. “우리는 죽도록 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서태석은 법정에서 “본인을 사회주의자라 하였으나, 지금의 사회제도로는 도저히 우리 민중이 살 수 없으므로 그 주의를 취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서태석은 옥살이를 했지만 소작인들은 소작료 4할을 쟁취한다. 20세기 한국 사회운동의 몇 안 되는 승리의 기억이다.

1928년에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한번 더 잡혀간다. 풀려난 뒤 1930년대 후반부터 서태석은 정신질환으로 고생한다. 고문과 옥살이 후유증이었다고 한다. 1943년, 논에서 벼 뿌리를 움켜쥐고 하늘을 향해 눈을 홉뜬 채 숨진다. 군부독재 시절 그는 잊혔다. 좌파운동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한편 소작쟁의 때 ‘악역’을 맡은 문태현의 아들 문재철은 마냥 악덕 지주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다음 글에서 회색인 문재철의 삶을 살펴보려 한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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