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원본 보며 수백 년 전 글쓴이와 함께 ‘호흡’

서울앤 2024. 3. 28. 16: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작은 박물관 ㊴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전시실

[서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건물 앞 바위에 새겨진 奎章閣(규장각) 글씨는 숙종 임금의 친필 필체다.

세계기록유산 된 규장각 여섯 기록물

실록, 의궤, 일기 등 꽉 채운 수많은 글씨

조선 왕실서부터 동학농민혁명까지

당시 현장의 분위기 생생하게 느껴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전시실

형식은 내용을 빛나게 하고 내용은 형식을 굳게 만든다. 내용은 형식을 통해 드러나고 형식은 내용을 강하게 만든다. 내용과 형식을 담고 있는 조선의 기록물은 그래서 힘이 세다. 조선왕조실록부터 동학농민혁명기록물까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규장각 소장 조선의 여섯 가지 기록물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전시실에서 보았다. 오는 8월16일까지 이어지는 ‘규장각 세계기록유산 특별전’에 나온 기록물이다. 이번 전시는 2023년 5월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열렸다. 김희경·박성일 학예연구사의 자세한 설명으로 당대의 현장감이 더 깊게 느껴졌다.

전시실로 들어가면 규장각 편액이 보인다(사진 오른쪽 위). 숙종 임금 친필로 새긴 복제본 편액이다.

대동여지도와 숙종 임금 어필 규장각 편액

세로 약 6.7m, 가로 약 3.3m의 커다란 한반도 지도가 지하 1층 전시실로 내려가는 계단 앞 벽에 걸려 있다. 그 크기에 놀라고 지도가 품은 내용에 가슴이 웅장해진다. 조선시대 사람 김정호가 완성한 조선전도, 대동여지도다.

안내문에 한반도를 남북으로 120리 간격 22층으로 나누고, 하나의 층을 1첩으로 만들었다. 1첩의 지도는 동서 80리 간격으로 구분해 1절로 하고 1절을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게 했다고 적혔다. 휴대하거나 보기 편하게 만들었다. 필요한 지역의 지도만 가지고 다니며 볼 수 있으며 그걸 다 모으면 저렇게 큰 조선전도가 되는 것이다. 지도에 선과 점, 기호를 사용해 거리와 축척, 군현의 경계, 시설물을 표시하고 옛 지명 등 여러 정보를 담고 있다. 목판본으로 만들어 좀더 편리하게 지도를 보급할 수 있게 했다.

전시실로 내려가는 계단 벽에 걸린 대동여지도 복제품. 원본과 같은 크기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규장각과 조선의 기록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 이번 전시를 여는 글 등이 빼곡하게 적힌 공간이 나온다. 그곳에서 눈에 띄는 건 숙종 임금의 친필로 새긴 ‘奎章閣’(규장각) 복제본 편액이다. 학예사는 건물 앞 바위와 건물 현관 위에 새겨진 ‘奎章閣’이라는 글자도 숙종의 필체라고 설명한다.

전시실 안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우리를 맞이하는 한 문장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임금이 두려워할 것은 하늘이요, 사필(史筆)입니다.’ 전시된 조선왕조실록 원본을 보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조선왕조실록 중정조실록. 창덕궁에 규장각을 설립한 내용이 적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당시 사람들의 마음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왕 472년의 역사를 연, 월, 일 순서에 따라 기록한 연대기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조선왕조실록 1202책이 소장됐다.

조선왕조실록 중 정조실록에 기록된 ‘창덕궁에 규장각을 설립한 내용’을 적은 장이 펼쳐져 있다. ‘규장각을 창덕궁 금원의 북쪽에 세우고 제학, 직제학, 직각, 대교 등의 관원을 두었다.… 처음에는 어제각으로 부르다가 나중에 숙종 어필 편액에 쓰인 대로 규장각이라 명명하였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태조실록에는 태조가 사관에게 사초를 바치게 했으나 도승지가 왕과 대신이 사초를 열람하면 사관이 역사를 그대로 쓰지 못하게 된다고 만류한 일화가 기록됐다. 왕도 실록과 사초를 마음대로 보거나 어찌 할 수 없다는 원칙이 처음부터 지켜진 대목이다. 펼쳐진 태조실록과 태종실록에 보이는 얼룩은 조선 전기에 실록 보관을 위해 밀랍 처리한 자국이라고 설명한다. 조선 전기 사람들의 실록 보관에 대한 마음을 읽는다. 방습, 방수를 위해 밀랍 처리를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게 얼룩으로 남은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실록궤.

영조실록청의궤도 전시됐다. 영조실록 편찬 과정을 기록한 의례의 본보기다. 실록 편찬에 참여한 관리 명단, 편찬 과정, 장인의 명단, 종이와 목재 등 각종 물자를 조달한 내용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내용을 담기 위한 절차와 방법, 의례까지 기록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선조실록수정청의궤도 전시됐다. 설명에 따르면 인조반정 이후 서인은 선조실록에 빠진 기록이 많아 보완이 필요하며 광해군 후반기에 북인 주도로 이루어진 실록 편찬이 당파 서술로 공정하지 못하다 하여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할 것을 제기했다. 처음으로 시행된 실록 수정 작업에 대한 기록물이다. 실록을 수정하는 절차와 내용을 담고 있다.

선조실록에 기록된 이이의 졸(卒)기에는 ‘이조 판서 이이가 졸하였다’라는 한 문장이 다였다.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된 이이의 졸기에는 ‘이조 판서 이이가 졸하였다.… 이이는 타고난 자질이 매우 고명하였는데, 이를 잘 채우고 길러 더욱 심후한 경지에 이르렀다.… 어리석은 이와 지혜로운 이를 막론하고 마음으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고쳐 적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사관이 실록 보관과 관리 실태를 확인하고 남긴 기록물인 실록포쇄형지안도 볼 수 있었다. 실록은 3년에 한 번씩 햇볕과 바람을 쐬고 다시 보관하는데, 그 절차와 방법을 자세히 기록했다. 실록을 담았던 ‘실록궤’ 또한 당시 모습 그대로 전시됐다.

승정원 일기(낙장). 승정원일기를 보관하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낙장을 별도로 묶은 책이다.

승정원일기, 일성록, 조선왕조의궤, 조선통신사기록물,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을 차례로 보다

복제본이 아닌 진품을 본다는 것은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과 온기를 고스란히 느끼는 일이다. 게다가 한 자 한 자 손으로 써내려간 글자들이 수백 년을 지나 지금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 소중하다. 책에 적힌 글자들이 그 뜻을 품고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학예사와 함께 승정원일기가 전시된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의 업무 일기로, 1623년(인조 1년)부터 1910년(융희 4년)까지 288년 동안 써내려간 3243책, 39만3578장, 2억4250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기록이다.

승정원의 담당 관서, 소속 관원, 법전 규정, 업무 수행 지침과 절차, 참고 사항 등을 모아 정리한 책 <은대편고>를 볼 수 있었다. 이후 간행된 <은대조례>의 저본이다. 1638년(인조 16년) 6월13일부터 9월17일까지 왕과 신료들의 대화를 승정원 입시 주서가 기록한 초책도 전시됐다. 속기처럼 적어 내려간 글자에서 당시 현장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창덕궁 화재로 임진왜란 이후부터 1721년까지 130년간의 일기 1793권이 소실됐는데, 일기청에서 각 관청의 일지, 등록, 주서를 지냈던 사람들의 당후일기, 조보(승정원에서 재결 사항을 기록하고 반포하던 관보), 개인일기 등을 모아 548권을 복원하기도 했다.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 정조 임금의 능을 조성한 과정을 기록했다. 사진은 사수도 중 하나.

1760년(영조 36년)부터 1910년(융희 4년)까지 151년 동안 국정 제반사항을 일기체로 기록한 일성록은 왕이 자신의 왕정을 반성하고 정책 결정의 참고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편찬한 연대기다. 조선왕조의궤는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의례와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종합보고서다. 의궤 546종 2940책이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됐다. 의궤를 보면 출생부터 죽음까지 그리고 죽은 뒤 산릉의 조성까지 왕의 일생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충의롭고 정대한 기상이 이국(異國)을 감동시켜 우리를 적대하는 마음이 어느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라는 한 문장에 조선통신사기록물의 힘이 느껴진다. 조선통신사기록물은 에도 막부의 초청으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조선 정부가 일본에 파견한 외교 사절단의 기록이다. 여정의 기록도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6종 41책이 소장됐다.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그에 대한 지배층의 대응, 동학농민혁명의 결말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물이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56종 137책이 소장됐다.

‘일신의 해 때문에 봉기함이 어찌 사내의 일이겠는가. 많은 백성의 원망과 탄식으로 백성을 위하여 해를 제거하고자 함이라.’ 1895년 2월9일부터 3월10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전봉준을 신문한 기록인 전봉준 공초에 기록된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대의다. 흥선대원군이 동학농민군을 두고 쓴, ‘토벌하여 죽여 마땅한 존재이나 무기를 놓고 귀화한다면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의 회유 글도 전시됐다. 최제우가 지은 가사 8편을 최시형이 묶은 가사집, 용담유사도 볼 수 있다.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보국안민의 뜻이 담겼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한겨레 금요 섹션 서울앤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