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8] 토끼와 다로와 목련과 제비꽃과

정수윤 작가·번역가 2024. 3. 2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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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내리네

나무 사이 보이는

바다 가는 길

春雨[はるさめ]や木[こ]の間[ま]に見[み]ゆる海[うみ]の道[みち]

우산을 들고 산책길에 나선다. 촉촉한 빗물이 땅으로 스며들자, 신선한 흙 내음이 코끝을 간질인다. 물기를 머금은 달콤한 봄바람이 뒷덜미를 쓰다듬고, 희고 부드러운 목련 꽃봉오리가 오늘 필까 내일 필까 숨 고르는 소리를 들으며, 벌써 활짝 핀 제비꽃이 보랏빛 빗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본다. 봄비다.

에도 시대 사람 오쓰니(乙二·1756~1823)는 종이우산을 썼나 도롱이를 걸쳤나, 봄비쯤이야 그냥 맞아도 좋지 하며 맨몸으로 걸었나. 조록조록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바다로 난 솔숲을 걸으면, 향긋한 소나무 사이로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뺨에 닿는다. 혼슈의 북쪽에서 태어나 조각배를 타고 오늘날 홋카이도(당시 에조치) 하코다테까지 건너간 오쓰니의 하이쿠다.

바다는 때때로 거칠지만 때때로 낙원으로 이어진다. 오래전 아시아의 파라다이스로는 용궁이 유명했다. 한국의 ‘토끼전’에서는 토끼가, 일본의 ‘우라시마 다로’에서는 다로가, 지상에 없는 멋진 낙원을 구경하러 거북이 등을 타고 바닷속 용궁으로 여행을 떠난다. 용궁에 도착한 토끼와 다로는 화려한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갖가지 맛난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공연을 보며 꿈같은 삶을 누린다. 먹고살 걱정도 없고 일할 필요도 없고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니 여기가 바로 낙원이로구나! 그러던 토끼와 다로에게 불행이 닥친다.

“토끼야, 사실은 네 간이 좀 필요해. 내 병이 나으려면 네 간을 먹어야 한다.” (용왕님의 무시무시한 말에 토끼, 속으로 벌벌 떨며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다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하여) “어머, 진작 말씀하시지요. 육지의 볕 좋은 곳에다가 간을 널어두고 왔지 뭐예요. 얼른 가서 가져올게요. 가자, 거북아.” 토끼는 그렇게 죽음을 모면하지만, 다로는 불행을 비켜 가지 못했다.

용궁에서 실컷 놀다가 집이 그리워진 다로가 떠나려 하자 공주님이 절대 열어보지 말라면서 귀한 상자를 준다. 다로가 육지에 내리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바닷속에서 며칠 놀다 왔을 뿐인데 지상에서는 700년이 흐른 것. 이럴 수가. 좌절한 다로가 상자를 열자 펑 소리와 함께 연기가 나며 다로는 백발 할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저런, 저런, 파라다이스는 어디인가. 조록조록 봄비 내리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다행히 이웃집 목련도 아직 피기 전이고, 보랏빛 제비꽃도 여전히 싱그럽다. 조금 더, 이 봄을 즐길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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