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당신의 세계는 변하고 있습니다
영화 ‘오키쿠와 세계’의 몰락한 사무라이는 한 남자에게 묻는다. “자네, 세계라는 말을 아나?”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사무라이의 딸 오키쿠는 ‘세계’를 쓸 수는 있어도 그게 뭔지 모른다. 오키쿠를 도와주려는 스님은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말한다. “여어어기서부터 저어어기까지”가 세계라고. 글자를 배우는 아이들도, 글자를 가르치는 오키쿠도, 세계의 뜻을 말한 스님도 모두 어리둥절하다. 영화 배경은 19세기, 서구어 번역어인 ‘세계’라는 말이 세상에 퍼지기 전이라 그렇다. 그들과 달리 21세기 사람인 우리는 ‘세계’를 안다. 그런데 ‘지구상 모든 나라’ 또는 ‘인류 사회 전체’가 세계라는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를 본 나는 어리둥절했다. 우주여행을 할 현실적 방법을 모색하는 이 시대에 지구만 세계인가? 인류가 아닌 포유류나 균류는 세계가 아닌가? 과연 그런가?
영화를 보면서 지금 대단한 작품을 보고 있다는 떨림을 느꼈는데, 여기서는 ‘세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한다. ‘세계’가 새롭게 느껴졌다는 말을. 공기처럼 흔하고 익숙해서 이 단어가 얼마나 크고 심원한지 느낄 만한 일이 없었는데 말이다. 사회보다 크고, 세상보다 추상적이고, 사회보다 감정적이고, 세상보다 중립적인 단어가 ‘세계’ 아니던가. 이런 걸 다 고려해서 이 칼럼 문패를 ‘느낌의 세계’로 지은 건 아니지만 내 무의식은 ‘세계’가 품은 가능성에 꽂혔을 것이다. 19세기 아시아인들은 서구에서 들어온 새로운 개념을 어떻게 자기 나라 말로 옮길지 고민했고, 한국은 근대화가 일렀던 일본의 번역어를 가져와 쓴 경우가 많다. 2003년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번역어 성립 사정’을 보면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던 과정을 알 수 있다. 야나부 아키라가 쓴 이 책은 1982년 이와나미 문고로 나왔고, 한국에서는 세 출판사에서 2003년, 2011년, 2020년에 나왔다.
‘번역어 성립 사정’을 보면 사회, 개인, 근대, 미(美), 연애, 존재, 자연, 권리, 자유, 그와 그녀라는 말이 쓰이기까지 있었던 이야기가 나온다. ‘세계’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또 ‘그녀’가 신조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지시대명사가 인칭대명사로 확장된 경우다. He는 그이고 She는 그녀라고,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는 것을 고심해서 만든 것이다. 이 책을 보다 보면 당연한 것은 없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관념이 없으면 말도 없고, 말이 없으면 관념도 없다. 정확히 뭐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세계’라는 말이 없던 시절에 세계의 함의를 짐작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투르게네프의 소설 ‘루딘’의 번역본을 비교한 게 흥미롭다. 1897년 번역된 판본에는 그가 4번 나오는데, 1952년 번역본에는 그가 302번, 그녀가 154번, 그들이 2번 나온다고 한다. 두 번역본이 출간된 사이에 그와 그녀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말일 것이다.
이 책을 보다가 얼마 전 아는 작가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유럽에서 하는 문학 행사에 초청받은 그에게 인적 사항에 관한 질문이 메일로 왔다고 한다. ‘젠더’난에 네 가지 선택항이 있었다. 첫째, 논바이너리(non-binary) 또는 젠더 논컨퍼밍(gender-nonconfirming). 둘째, 여성. 셋째, 남성. 넷째, 어떤 카테고리에도 포함되고 싶지 않음. 논바이너리는 여성도 남성도 아니라는 뜻이고, 젠더 논컨퍼밍은 ‘젠더에 순응하지 않음’이라는 의미. 나는 네 선택항을 보며 이제 이 세상의 성(性)은 네 가지 이상임을 느꼈다.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여성으로 느끼거나,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남성으로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성을 밝히고 싶지 않은 경우도 있고, 성이 유동적으로 바뀌는 경우(젠더 플루이드·gender fluid)도 있다.
논바이너리나 젠더 논컨퍼밍은 자신을 데이(They)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남성형의 3인칭 대명사가 He이고 여성형의 3인칭 대명사가 She인 데 대한 반박일 것이다. 논바이너리인 사람을 3인칭으로, 그러니까 They로 지칭하면 원래 문법대로 동사 are가 오는지 is가 오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런 인물이 나오는 외국어로 쓴 소설이 번역되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2024년 한국의 번역가는 이런 이 시대의 질문에 어떻게 응답할지 말이다. 또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니면 논쟁거리가 될지 말이다. 세계는 변해 왔고, 관념도 변해 왔고, 말도 변해 왔으므로 계속해서 말과 관념은 변해야 한다. 나는 이 세계가 그렇게 혼돈 속에서 유지되어 왔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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