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집을 짓지 않는 나라의 건축
새 집 10채 중 9채가 아파트인데 창의적 건축 문화 꽃필 수 있을까
올해 프리츠커상이 ‘또’ 일본에 돌아갔다는 기사를 쓰면서 수상자를 9명이나 배출한 저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여러 해석 중에 지금까지 곱씹는 것은 ‘집’에 대한 이야기다. “단독주택 중심의 주거 문화 덕에 젊은 건축가들이 이런저런 시도를 해볼 기회가 많다.”(KAIST 조현정 교수)
역대 일본 수상자들의 선정 발표문과 언급된 작품들을 다시 훑어봤다. 올해 상을 받은 야마모토 리켄은 초기작인 요코하마 자택(1986)에서 소통과 교류라는 철학을 확립했다. 금붕어 밥을 주며 하루를 시작하는 그는 어항을 테라스에 두고, 이웃한 건물 옥상에 화분을 돌보러 올라오는 할머니와 아침마다 인사를 나눴다. 안도 다다오(1995년 수상) 역시 17평 땅에 지은 오사카 주택 ‘스미요시 나가야(1976)’에 콘크리트와 빛, 간결함이라는 핵심을 전부 담았다. 어린 시절 건축에 관심이 없었다는 이토 도요오(2013년 수상)도 집 짓는 지인들을 위해 평면도를 구상해 주곤 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소개돼 있었다.
왜 집인가. 예전 취재 현장에서 만난 어느 건축가는 “주택이 설계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했다. 주택은 규모가 작고 예산도 대개는 적어서 젊은 건축가에게도 일감이 돌아간다. 자본이나 외부 입김을 비교적 덜 받아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도 유리하다. 설계하기 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큰 빌딩보다 까다로울 수도 있다. 빌딩은 계단 같은 설비와 사무 공간을 적절히 나누는 일반해(一般解)로 풀 수 있지만 주택은 식구끼리도 제각각인 습관과 취향, 그리고 서로의 관계를 면밀하게 살펴 특수해(特殊解)를 찾아야 한다. 프리츠커상 초대 수상자인 필립 존슨이 “마천루보다 집이 훨씬 어렵다”고 한 것은 그런 의미다. 20세기 건축의 기념비가 된 자택 ‘글라스 하우스’(1949)를 설계한 그는 “내게 집이란 언젠가 나 또는 다른 이들의 작품에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 저장고”라고 했다.
지금 한국 건축에서 가장 뜨거운 분야는 카페다. 한국건축가협회에서 매년 완성도 높은 건물 7곳을 선정해 상을 주는데, 2022년 수상작 가운데 3곳이 카페였다. 지난해 건축 잡지 ‘SPACE’는 이런 ‘카페 현상’을 특집으로 다뤘다. 좋은 카페를 설계하고자 애쓰는 건축가들의 작업을 색안경 쓰고 볼 필요는 없다. 특집이 짚은 것처럼 이 시대의 공공 장소인 카페에서 더 많은 사람이 좋은 공간을 경험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페와 집은 접근법이 다르다. 집이 시간 두고 익어가는 멋과 맛을 추구한다면 상업 공간인 카페는 당장 인스타그래머블(소셜미디어에서 눈길을 끌 만한) 디자인에 중점을 두기 마련이다. 건축가들이 자주 이야기하듯 건축이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 할 때 어느 쪽이 본질에 가까운지는 자명하다.
건축가 서재원이 최근 펴낸 책은 우리에게도 집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던 때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재해석한 1960~1970년대 한국 건축가들의 작품 중엔 우산을 테마로 한 집도 있고 한쪽 입면(立面)이 얼굴처럼 보이는 집도 있다. 제목이 ‘잃어버린 한국의 주택들’이다. 안타까운 한편 한 해 허가받은 주택의 88%를 아파트가 차지(국토교통부 2023년 집계)하는 나라, 집을 짓지 않는 나라의 풍경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제목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파트는 나쁘고 단독주택이 좋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아파트밖에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곳에서 창의(創意)가 다채롭게 꽃을 피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9명이나 받은 상을 우리는 아직 받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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