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지족(知足)
여럿 어울려 식당에라도 가면 아예 제 입에 맞거나 맛있는 반찬만 골라 부리나케 먹어 치우고는 주인더러 더 달라고 채근하는 사람이 꼭 있다. 남은 반찬들 다 먹고 모자라면 그때 더 달라 하자고 말리면, 돈 더 내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느냐고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세상을 아주 영특하게 잘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영악스레 구는 건 현명한 삶의 방식이 아니다. 속이 다 보이기 때문이다. 자잘한 이득에 눈이 멀면 큰 이익을 놓친다.
자신이 만일 식당 주인이면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반가울 리 만무하다. 예상한 손님 수에 맞춰 반찬을 장만했는데 귀한 반찬만 떨어지면 나중에 온 사람에게는 상을 갖춰내기 곤란하지 않은가. 주구장창 마늘만 먹고 형색을 얹는대서 인간이 되는 게 아니다. 욕심도 좀 내릴 줄 알고, 상대방 입장도 헤아리고 배려할 줄 알아야 비로소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어렸던 시절엔 무얼 해도 배가 고팠다. 그 시디신 탱자도 으깨 먹고, 옥수숫대를 씹어 단물을 빨아먹느라 주둥이 가가 시커메진 채로 뛰어다녔다. 잠자리도 짚불에 그슬려 먹었다. 제사 떡 찌는 시루와 솥 틈을 메웠던 밀가루 반죽도 그렇게 고소할 수 없었다. 어른 상 볼락 대가리도 횡재여서 잘근잘근 씹어먹었다. 밀감을 처음 맛보았을 때는 어쩜 이리 맛있는 과일이 다 있는가, 세상을 다시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먹을 게, 맛있는 게 지천이어서 마냥 늘어나는 뱃살 타박이나 하고 자빠져 있다. 지나친 열량을 섭취해서 운동으로 살을 빼야 하는 억지가 당연한 것처럼 사는 세상이다. 내 몸에 필요한 만큼만 먹어야 하는데 맛있는 음식에 중독되어 먹고 또 먹는다. 그러나 너무 맛있는 것만 골라 먹다 보면 금세 물려 더 맛있는 것, 더 강렬한 것 아니면 욕구를 채우지 못하게 된다.
쾌락은 욕심대로 한도 끝도 없이 충족되지 않는다. 더 강렬한 쾌락만 좇다 보면 머잖아 반드시 망가진다. 쾌락의 끝판왕은 파멸이다. 진정한 향락은 멈출 줄 앎에 있다. 음주도 마찬가지다. 적당한 취기가 올라 기분이 약간 좋을 때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애주가다. 모진 사람일뿐 멋을 모른다고 비웃을지 모르나 이게 마지막 날까지 이어지는 지속 가능한 향락의 요령이다.
자전거 부품 하나를 좀 더 비싼 제품으로 갈면 바로 신세계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그도 그뿐, 이삼일 지나면 아주 미미한 차이로 돌아서고 만다. 그제야 정신 차리게 된다. 더 좋은 부품을 사고 끝도 없이 바꿔도 돈만 날리고 조금 나아진 성능을 타게 될 뿐이다. 바로 한계효용이다.
옛날, 한 친척이 오랜 고생 끝에 돈을 좀 모았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시샘 섞어 이게 무슨 궁색이냐, 좀 더 좋은 집을 사서 편하게 사시라 권했지만 고모는 사람이 제 분수를 알아야 한다고 손을 내저었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좀생이 할머니라 입을 비쭉댔지만 어려운 사람을 남몰래 도우며 허름한 집에서 검소하게 살다가 돌아가셨다. 이걸 지족이라 한다.
생각해 보건대 내게 가장 맛있는 음식은 푹 끓인 된장 시래깃국에 밥을 푹푹 말아 잘 익은 김치를 척척 걸쳐 먹는 국밥이다. 암만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이런 음식에 어쩌다 고기를 먹어야 그 황홀한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또 양념이 너무 강렬하면 본래의 식재료 맛을 놓친다. 어쨌건 그 본연의 맛을 즐기는 일이 기본이어야 한다.
여태껏 우리가 경탄해 온 지성이란 결핍과 고통을 극복하고 얻은 산물이다. 부른 배에 늘어져 있으면서 만인이 칭송해 마지않는 창조물을 이루긴 어렵다. 잘한다, 잘한다고 소쿠리 비행기를 태워줘도 적당한 고도에서 내려와야 탈이 없다. 이걸 겸양이라 한다.
가난한 나도 좋은 기물은 몇 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까워서 쓰지 못하고 보관만 해 뒀으니 결국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어리석은 것. 아이들에게 물려준다 해도 결국 넣어두기만 하면 짐이 될 뿐이다. 적당히 좋은 것, 내 분수에 맞는 걸 잘 쓰다 깔끔하게 비우는 게 현명한 삶이다. 욕심이 과하면 모든 걸 잃게 된다. 내게 주어진 복을 낭비하지 않고 만족할 줄 알면 도처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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