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오, 이 슬픔, 이 죽일 사랑

이유진 기자 2024. 3. 27.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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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재출간 요청 쇄도한 최진영 장편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전면 개정한 <원도>

맹목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은 <구의 증명>(최진영 지음, 은행나무 펴냄)은 어느 날 느닷없이 역주행했다. 출판계는 이를 미스터리로 본다. 출간은 2015년, 역주행은 2021년. 결정적 기폭제가 될 만한 사건은 분명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역주행 이후 책 판매량이 감소하지 않은 것도 이례적이었다.(격월간 문학잡지 <릿터> 제46호 참고)

그 뒤 최진영 작가의 작품 상당수가 재발견됐는데, 그중에서도 장편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실천문학사 펴냄, 2013년)는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출판사 내부 사정과 작가 개인적 이유가 맞물려 작가의 뜻으로 절판됐지만 책은 조용히 잊히지 않았다. 중고책 가격은 정가의 서너 배 넘는 값으로 뛰었고 독자들은 “제발 손에 넣게 해주세요”라며 절판된 책 정보 아래 간절한 댓글을 달았다. 11년 만에 전면 개정판으로 나온 소설은 <원도>(한겨레출판 펴냄)라는 새 제목을 달았다. 처음 작가가 달았던 제목이다.

엄마의 애정을 갈구했고 질문이 많았던 아이, 원도는 이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는 어른”이다. 여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아들의 눈앞에서 “아버지를 믿어라”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물을 마시고 죽었다. 이후에 만난 또 다른 아버지는 폭력적이었고, 엄마는 다른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느라 원도의 목마름을 적셔주지 않았다. 결핍 가득한 원도와 달리 친구 장민석은 사랑받았다. 원도의 부모조차 그에게 관대하고 특별히 대했다. 가상의 장민석과 경쟁하며 원도는 불안, 고통, 고독 속에 머물렀다. 내내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곁에 두고 살아갔다. 파산자에 범죄자에 도망자가 되고, 버려진 원도는 죽지 않고 질문한다. “누구야, 내 친아버지는.”

죽은 아버지와 산 아버지, 뚝뚝 눈물을 떨구는 어머니 사이에서 원도는 어떤 말을 듣고자 했고, 끝내 어머니에게 무언가 부탁한다. 죽은 아버지와 자신의 지난날을 애도하지 못해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는 한 사내의 절박한 요청, 그것은 제발 사랑해달라는 갈구이기도 했다.

최진영 작가는 “나에겐 사랑이 필요하다는 호소. 그것을 전하려고 계속 소설을 쓰는 것만 같다”고 ‘새로 쓴 작가의 말’에 적었다. “원도의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다음 질문으로 건너갈 수 있었음을”이라는 작가의 말에서 <원도>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비장하고 어두운 서사와 지옥도 같은 풍경이 농도 짙게 펼쳐지는 ‘최진영 월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소설. “사랑하면서도 증오하여 만든 마음의 구멍”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21이 찜한 새 책

나의 장례식에 어서 오세요

보선 지음, 돌베개 펴냄, 1만8500원

<나의 비거니즘 만화> 작가 보선의 그림에세이. 어느 순간부터 죽음에 대해 고민하던 작가 보선은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4월12일 자신의 ‘장례식’을 올렸다. 초대받은 ‘하객’들은 작가의 유튜브 라이브 장례식에 참석해 축하의 말을 남겼다. 정해둔 시간이 다가올수록 일상을 느끼는 감각이 세밀해지고, ‘지금 여기’에 머물게 되는데….

하나의 거대한 서점, 진보초

박순주 지음, 정은문고 펴냄, 2만8천원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책의 거리인 일본 진보초 이야기. 메이지 시대 초기, 도쿄대학이 설립되고 이후 여러 대학이 들어서면서 진보초에 서점이 하나둘 문을 열었다. 책장마다 주인이 다른 ‘파사주 바이 올 리뷰스’, 콩알만 한 책을 파는 ‘로코서방’, 동심의 세계로 안내하는 ‘북하우스 카페’ 등 개성 만점 서점들 속으로.

오리들

케이트 비턴 지음, 김영사 펴냄, 2만9800원

캐나다 만화가 케이트 비턴은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자 ‘돈이 흘러넘치는 곳’, 서부 앨버타 오일샌드 광산으로 떠난다. 세계 최대 석유회사의 공구실에서 돈을 벌지만 그곳은 차별, 고립감, 환경파괴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세계 최악의 일터였다. 작가 개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그래픽노블.

자본의 성별

셀린 베시에르·시빌 골라크 지음, 이민경 옮김, 아르테 펴냄, 2만9800원

왜 여성 가족은 남성 가족보다 가난할까? 20년간의 추적 관찰, 심층 면담, 분석을 통해 가족 안에서 왜 여성이 빈곤해지는지, 가족 관련 법과 실행이 어떻게 여성에게서 부를 체계적으로 박탈하는지 살폈다. 유물론적 페미니즘 관점으로 ‘부의 불평등’ 문제에서 곧잘 무시되는 성별과 가족 이슈를 집중 공략한 프랑스 페미니즘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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