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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재건축 불패신화 [COVER STORY]

평당 1000만원 공사비에 조합원 ‘부글’
‘재건축=황금알 낳는 거위’ 환상 깨져

  • 김경민 기자
  • 입력 : 2024.03.22 15:19:14
  • 최종수정 : 2024.03.29 14:27:57
지난해 서울 강북의 한 재건축 단지를 매수한 정 모 씨는 요즘 밤잠을 못 이룬다. 재건축 분담금만 적어도 3억원 넘게 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정 씨는 “집값에다 수억원 분담금을 감안하면 수익은커녕 오히려 손해 보지 않을까 걱정된다. 무너질 듯한 집에 살면서 주차 불편까지 감수했는데 뭐하러 ‘몸테크’를 해왔나 싶다”고 토로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렸던 재건축 시장에 이상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큰돈 안 들이고 중대형 평형 새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다는 기대에 투자 수요가 몰렸다. 덩달아 재건축 아파트 매매가도 고공행진했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고금리에 따른 공사비 인상으로 재건축 분담금이 치솟으면서 기대만큼 수익을 내기 어려워졌다. 집값보다 분담금이 더 비싼 사례도 속출하면서 투자자들이 재건축 아파트를 외면하는 양상이다.

더 이상 재건축 투자로 돈 버는 시대는 끝난 것일까. 안갯속에 빠진 대한민국 재건축 시장의 앞날을 진단해본다.

# 8억8000만원.

서울 금천구 남서울럭키아파트 재건축추진위원회가 최근 예비신탁사로부터 받은 가구당 분담금 견적이다. 추진위가 단지 고급화에 나서면서 예상 공사비가 3.3㎡당 950만원으로 치솟은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남서울럭키아파트 공사비는 최근 입주한 서울 서초구 반포 ‘래미안원베일리’ 공사비(3.3㎡당 583만원)보다 무려 60% 이상 높은 수준이라 조합원 반발이 커지는 와중이다.

# 서울 송파구 잠실진주아파트는 시공사인 삼성물산·HDC현대산업개발과 조합 간 공사비 분쟁으로 내년 6월로 예정됐던 준공 일자가 6개월가량 더 미뤄질 전망이다. 시공사가 3.3㎡당 공사비를 기존 660만원에서 889만원으로 인상할 것을 제시하자 조합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시공사는 다시 823만원을 제시했는데 조합이 오는 4월 총회에서 이 금액을 받아들일지가 관건이다.



집값보다 분담금 높은 사례도

노원 상계주공5단지 분담금만 5억

공사비 문제로 조합과 시공사 간 갈등이 커지면서 서울, 수도권 재건축 사업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가구당 수억원씩을 내야 하는 조합원 입장에서는 시공사가 제시한 공사비를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시공사도 가뜩이나 부동산 경기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공사비를 올려받지 못하면 대규모 손실을 떠안을 수밖에 없어 팽팽히 맞서는 중이다. 양측 모두 한 치의 양보 없는 눈치작전을 벌이는 중이다.

주거환경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재건축, 재개발 등 도시정비사업 평균 공사비는 3.3㎡당 687만5000원으로 집계됐다. 2020년까지만 해도 480만3000원 수준으로 500만원 선에도 못 미쳤지만 3년 만에 40% 이상 오른 셈이다.

아파트 공사비가 치솟은 이유는 뭘까.

코로나 엔데믹 이후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심화된 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지정학적 리스크 여파로 건설 원가의 30%가량을 차지하는 건설 자재비가 급등한 탓이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따르면 올 1월 기준 건설공사비지수는 154.64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2020년 1월(118.3)과 비교하면 30% 이상 오른 수치다. 건설공사비지수란 건설 공사에 투입되는 재료, 노무, 장비 등 직접 공사비의 가격 변동을 나타내는 통계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자료를 봐도 지난 3년간 시멘트 가격은 54.6%나 올랐고 철근(64.6%), 형강(50.4%), 아연도금강판(54.1%) 가격도 큰 폭으로 뛰었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인건비 상승도 무시 못할 부담이다.

대한건설협회가 조사한 ‘건설업 임금 실태조사’에 따르면 올 1월 기준 건설업 근로자의 하루 평균 임금은 27만789원으로 2021년 1월(23만1779원)보다 16.8%가량 뛰었다.

문제는 공사비 상승 추세가 좀처럼 멈출 기미가 없다는 점. 그동안 원자잿값과 인건비가 공사비 상승의 주요인이었다면 최근에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등 안전기준 강화, 층간소음 사후인증제 등 각종 규제로 공사비 부담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는 우려다.

덩달아 공사 기간도 지상 29층, 1000가구 기준으로 기존 36개월에서 3~6개월가량 늘어나면서 공사비를 낮출 요인을 도무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건설업계 분위기다.

치솟은 공사비는 고스란히 재건축 조합원 분담금에 반영된다. 조합원 분담금은 공사비, 조합 운영비 등 전체 사업비에서 조합원·일반분양 수입을 뺀 금액이다. 조합원 분담금을 낮추려면 일반분양가를 높여 조합 수입을 늘려야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최근 재건축을 추진하는 단지들은 기존 용적률이 150∼200%에 달하는 중층 아파트가 대부분이라 일반분양분이 별로 없다. 분양가상한제에다 지자체 분양가 규제로 일반분양가를 무작정 높이기도 어렵다.

조합원 분담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서울, 수도권 재건축 사업이 줄줄이 지연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5단지 재건축 조합은 전용 31㎡ 기준 가구당 5억원의 분담금을 통보받았다. 기존 시세(4억6000만원)보다 분담금이 더 높자 집주인들이 줄줄이 매물을 내놓으면서 재건축 사업이 올스톱될 위기에 놓였다.

시공사와 소송전을 진행 중인 점도 악재다. 상계주공5단지 소유주들은 지난해 11월 전체회의를 열고 시공사 GS건설과의 시공 계약을 해지하기로 했다. 당초 기존 지상 5층, 840가구 단지를 재건축해 지상 최고 35층, 996가구 신축 아파트로 탈바꿈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공사비 상승으로 분담금이 치솟자 소유주들은 결국 시공사 계약 해지라는 초강수를 뒀다. 계약 해지를 통보받은 GS건설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지난해 말 상계주공5단지 재건축 시행사와 정비사업위원장을 상대로 60억원대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정비사업위원회에 낸 입찰보증금 50억원에 더해 계약 해지에 따른 손해배상으로 10억원을 내라는 것. 혹여 소유주들이 패소할 경우 거액의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만큼 재건축 사업성이 더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상계동 A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는 “노원구에서는 상계주공5단지를 비롯해 6, 7단지 등이 줄줄이 재건축을 진행 중인데 분담금이 높아지면 재건축이 지연될 가능성이 높다. 덩달아 가격을 낮춘 급매물이 쌓여가면서 일대 부동산 시장에도 찬바람이 불지 않겠나”라고 내다봤다.

상계주공5단지 재건축이 삐걱대자 인근 재건축 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모습이다. 총 3930가구로 서울 강북 최대 재건축 단지로 손꼽히는 노원구 월계동 시영아파트(미성·미륭·삼호3차) 전용 59㎡는 최근 6억9500만원에 손바뀜됐다. 2021년 9월까지만 해도 9억8000만원에 거래되며 10억원에 육박할 정도로 매매가가 뛰었지만 재건축 사업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가격이 급락하는 양상이다.

재건축 분담금이 치솟으면서 조합과 시공사 간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사진은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5단지 전경. (매경DB)

재건축 분담금이 치솟으면서 조합과 시공사 간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사진은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5단지 전경. (매경DB)



재건축 매매가도 하락세

잠실주공5단지 등 2억씩 ‘뚝뚝’

강남권 재건축도 곳곳에서 삐걱대고 있다. 서초구 잠원동 신반포22차 재건축 조합은 최근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2017년 3.3㎡당 공사비 560만원에 계약했는데 착공을 앞두고 시공사에서 3.3㎡당 1300만원대로 증액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서초구 반포지의 재건축 대어인 반포주공1·2·4주구 분위기도 심상찮다. 시공사 현대건설은 최근 조합에 인건비, 자재비 인상과 설계 변경 등을 이유로 총 4조원의 공사비를 청구했다. 당초 계약한 2조6000억원에서 55% 오른 금액이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3.3㎡당 548만원이었던 공사비는 829만원으로 껑충 뛴다.

최근 시공사 선정 입찰을 마감한 송파구 송파동 가락삼익맨숀 재건축 사업은 조합 측이 3.3㎡당 810만원의 공사비를 제시했는데도 유찰됐다. 지난해 입찰설명회 때만 해도 대형 건설사 8곳이 참여해 관심이 집중됐지만 최근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공사비 갈등 여파로 재건축 아파트 매매가도 연일 하락세다. 부동산R114가 지난해 11~12월과 올해 1~2월 거래된 서울 아파트의 최고 거래 가격 등락을 비교한 결과, 준공 30년을 초과한 재건축 대상 아파트는 하락 거래가 59.2%로 서울 전체 평균(49.6%)보다 10%포인트가량 높았다. 반면 상승 거래는 전체 평균(43.8%)보다 낮은 33.8%에 그쳤다. 일례로 송파구 잠실주공5단지 전용 76㎡는 지난해보다 2억원가량 떨어진 23억5800만원에 실거래됐다.

여경희 부동산R114 수석연구원은 “재건축 공사비가 떨어지기 어려운 데다 수억원의 초과 분담금에 초과이익 환수까지 감안하면 더 이상 재건축 아파트 투자로 큰 수익을 내기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공사비 인상 문제는 비단 서울, 수도권 개별 재건축 단지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하는 수도권 1기 신도시 정비사업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사업성이 좋은 서울 인기 지역 재건축 단지조차 시공사와의 갈등이 커지는 상황이라 1기 신도시에서는 벌써부터 괜찮은 시공사 구하기조차 어렵지 않겠냐는 관측이 나온다.

그렇다고 차선책으로 리모델링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도 만만찮다. 리모델링 역시 거액의 공사비 부담을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 중인 경기 안양 동안구 목련마을2단지 대우선경 조합원은 최근 전용 58㎡ 기준 4억7900만원의 추정 분담금을 통보받았다. 2021년 추정치(2억8600만원)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다.

윤재호 메트로컨설팅 대표는 “공사비 갈등으로 재건축을 비롯한 정비사업이 난항을 겪으면서 도심 주택 공급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당분간 공사비가 떨어지기는 어려운 만큼 정부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향후 부동산 시장 혼란이 더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2호 (2024.03.27~2024.04.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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