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KTX 달린 지 벌써 20년

2024. 3. 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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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1일 새벽.

내가 운행할 열차는 용산발 광주행 제235편, 상·하행 통틀어 고속 선로 첫 진입 열차였다.

"첫 열차 운행 축하합니다! 안전 운행하십시오." KTX가 다닌 지 어느새 20년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첫 열차를 몰던 감격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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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1일 새벽. 내가 운행할 열차는 용산발 광주행 제235편, 상·하행 통틀어 고속 선로 첫 진입 열차였다. 이른 시간인데도 플랫폼은 취재진과 정부 인사, 철도 관계자와 첫 열차를 타려는 승객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역사적인 첫 열차 출발 시각은 오전 5시 25분. 재깍거리는 시계의 초침이 발사를 앞둔 우주선의 '카운트다운'을 방불케 했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도 한국 철도의 역사가 새로 시작된다는 흥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출발 시각이 되었다. 기적을 울리고 조심스레 조종간을 당겼다. 400m 길이의 육중한 열차가 미끄러지듯 역을 벗어났다.

한강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강물에 뜬 서울의 불빛이 별처럼 반짝였다. 한강철교를 건넌 열차는 영등포를 휙 지나, 새로 건설된 고속 선로에 진입했다. 광명역에 멈춰 승객을 더 태우고 가속을 위해 조종간을 최대 출력 위치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시속 300㎞를 돌파했다. 관제실에서 무전이 왔다.

"첫 열차 운행 축하합니다! 안전 운행하십시오." KTX가 다닌 지 어느새 20년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첫 열차를 몰던 감격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나는 그 후 18년 동안 250만㎞를 달리고 정년퇴직했다. 그사이 KTX는 빛의 속도로 세상을 이어주고 현대인의 삶을 스마트하게 바꾼 최고의 교통수단이 되었다. 나는 요즘도 기차를 만나면 눈을 떼지 못한다. 운전 중에도 그러다 아내로부터 야단을 맞을 때가 많다. 달리는 기차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기억 속에서도 추억의 기차가 함께 달린다. 한데 그 기차는 자꾸만 먼 과거를 향해 달리려고만 든다. 그리하여 가끔 나를 유년의 정거장에 내려놓곤 한다.

나는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옛날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글을 몰랐던 어린 나에게 최고의 독서였다. 그것은 '전래동화'이자 '전설의 고향'이었으며 흥미진진한 '걸리버 여행기'였다. 그중 최고는 기차 이야기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유골을 가져오기 위해 친정 조카와 기차를 타고 만주를 다녀왔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때 기차 안에서 벌어진 갖가지 사건을 자세히 말해 주었는데 듣고 또 들어도 흥미로웠다. 오늘 굳이 내 돌아가신 할머니의 만주 여행기를 꺼내 든 이유는 KTX 개통 20년 동안 수없이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어서다. 여전히 끊어진 채, 이어질 듯 말 듯하다 이마저 잠잠해진 남북의 철도다. 내게 지금도 철로가 놓인 곳이라면, 그 어디든 달리고 싶은 소년의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나의 첫 번째 버킷리스트는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것이다.

시베리아 벌판에 들어서면 이틀을 꼬박 달려도 어쩌다 오막살이집 한두 채를 마주칠 뿐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거기는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는 각박한 우리와 다른 세상일 것이다. 그 땅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엄청난 대지의 힘을 가슴에 부려 넣으며 세상을 관조하고 내면의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뛴다.

한국 철도는 근대화와 경제 성장이란 일방 궤도를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 현대사의 다정한 동반자다. 앞으로 10년, 20년 후의 KTX는 나의 소망을 가득 싣고 달리길 소망해 본다. 문득 그때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떠오른다. 언제나 시작을 준비한 사람들의 노고는 값지다.

[손민두 소설가·전 KTX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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