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일하고 밤엔 공부…‘산업시대’여공들의 눈물·꿈 오롯이

박영수 기자 2024. 3. 27.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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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시련과 곤궁을 극복할 수 있는 소녀 외에는 이 교문을 들어설 수 없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양덕동에 있는 한일여고 교문에 적혀 있는 글귀다.

이 학교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1973년 '1억불 수출탑'을 수상한 한일합섬 공장을 방문했을 때 여공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공부가 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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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첫 산업체 학교 한일여고 50주년 역사관 개관
“원하는 것 뭐냐” 박정희 질문에
“공부 하고 싶어요” 답한게 계기
동문들이 십시일반 기금 모아
옛 교복·생활기록부 등 전시
당시 월급내역서도 볼 수 있어
집안 돕고 수출 이끈 삶 한눈에
17세 때 한일합섬에 입사해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한일여고를 졸업한 뒤 현재 한일여고에서 근무하고 있는 10회 졸업생인 김영심 씨가 학교 1층에 조성된 ‘50년관’에서 선배들의 졸업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창원=글·사진 박영수 기자 buntle@munhwa.com

‘어떠한 시련과 곤궁을 극복할 수 있는 소녀 외에는 이 교문을 들어설 수 없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양덕동에 있는 한일여고 교문에 적혀 있는 글귀다. 한일합섬에 다니던 어린 여공(여성 근로자)들을 위해 설립된 한일여고가 올해 개교 50주년을 맞아 동창생들의 기부금과 기증자료로 역사관을 개관한다. 한일여고는 지금은 일반고교로 전환됐지만 1회(1974년)부터 19회(1993년)까지는 한일합섬에 취업해 3교대로 근무하던 10대 여공들이 학구열을 불태운 전국 최초 산업체 부설학교였다. 한 학년이 한 반 60여 명씩 주야로 40반(2400여 명)이 운영될 정도로 공부에 목말랐던 소녀들은 일하고 공부하며 오빠·동생들의 학비를 대고 수출을 이끌어 대한민국 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다.

한일여고는 오는 29일 학교에서 지난 50년간의 기록을 보존하고 앞으로 역사를 담아낼 ‘50년관’ 개관식을 개최한다고 27일 밝혔다. 학교 1층 빈 교실을 리모델링한 50년관은 이젠 할머니가 된 70대 1회 졸업생부터 40대 주부까지 동문 559명이 십시일반 기부한 1억2000만 원으로 문을 열게 됐다. 50년관에는 교복과 생활기록부, 앨범 등 동문들이 기증한 다양한 자료가 전시돼 눈길을 끈다. 7회 졸업생이 기증한 1984년 7월 월급 내역에는 주간 근무일수, 야간 근무일수, 기본급, 야근 수당, 방위세, 국민저축 등이 적혀 있는데 월급은 14만3240원을 받아 공제금을 제하고 9만790원을 받은 것으로 찍혀 있다.

50년관에 기증된 3회 졸업생이 쓴 ‘그날이 올 때까지’ 제목의 원고.

이 학교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1973년 ‘1억불 수출탑’을 수상한 한일합섬 공장을 방문했을 때 여공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공부가 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한일여고는 이듬해 1974년 3학년 69학급으로 인가를 받아 개교했다. 그러나 돈을 벌면서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소녀들이 몰려들어 1978년엔 120학급으로 늘어 학생 수만 7200명에 달했다. 어린 여공들은 주간에 공장에서 일하면 밤에 등교하고, 야간에 근무하면 아침에 자고 오후에 수업을 들었다. 학교는 여공들의 학구열에 밤낮으로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8회 졸업생인 김선흥 교장은 “충남 서산에서 1남 3녀의 장녀로 태어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갈 수 있는 한일합섬에 1981년 입사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보탰다”며 “함께 입사한 친구들도 다들 공부를 할 수 있어 힘든 일도 버텨냈다”고 말했다. 동문회가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팔도 잔디의 꿈’에서도 당시 10대 여공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김매자(63) 씨는 ‘어느 시골소녀의 청춘일기’에서 “강원 삼척에서 5남 1녀로 태어나 ‘고교 진학을 포기하라’는 아버지 말에 어떻게 해서든 학교에 가고 싶어 동해선 기차를 타고 한일합섬에 입사해 1년간 3교대로 일하며 공부한 후 다음 해 한일여고에 입학했다”며 “여름휴가 때 예쁜 교복을 입고 고향으로 달려가 부모님께 큰절을 올리자 아버지는 교복을 입은 내 모습을 보고 엉엉 우시며 ‘너무 고맙다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께 ‘괜찮아요’라고 하면서 매달 용돈을 보내드렸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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