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간첩 귄터 기욤’을 우려한다[이미숙의 시론]

2024. 3. 27.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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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숙 논설위원
브란트 사퇴 낳은 동독 스파이
서독 정보부 장기 추적 후 체포
분단시대 서독은 방첩에 단호
국정원은 대공수사권도 박탈
중·러 스파이 저지할 법도 없어
유권자가 종북 세력 감시해야

‘민주주의(Democracy)’란 연극이 있다.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1913∼1992)를 사퇴로 몰아넣은 동독 스파이 귄터 기욤 스캔들을 다룬 것으로, 2003년 런던에서 초연됐고, 우리나라에서도 2013년 첫 공연 후 여러 차례 무대에 올려졌다.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학살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 감동을 준 브란트가 간첩인 비서 기욤 때문에 사퇴하는 과정을 그린 연극을 20년 전 뉴욕에서 보면서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 체제인지, 그런 시련을 견디며 통일을 이뤄낸 독일의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감동했던 기억이 새롭다.

동독 국가보안부인 슈타지의 비밀 요원 기욤은 1950년대 동독 탈출 망명자로 가장해 서독에 온 뒤 사회민주당원으로 활동하며 브란트의 신임을 얻어 최측근이 됐다. 그러나 서독 정보부의 오랜 추적 끝에 그가 1974년 간첩 혐의로 체포되자, 브란트는 총리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냉전 시대 동서 화해를 도모한 동방정책으로 재임 중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지만, 스파이 기욤으로 인해 정치생명이 끝난 것이다.

4·10 총선 이후 우리나라는 연극 ‘민주주의’가 보여준 분단시대 서독 정치 상황보다 훨씬 악화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통합진보당 후신 격인 진보당의 국회 진출 숙주 노릇을 자임하면서 2012년 총선 때 통진당이 지역구 7석, 비례대표 6석으로 국회에 진출한 이후 처음으로 종북파 인사들이 합법적으로 금배지를 달게 됐다. 민주당은 진보당과 60여 지역구의 후보 단일화를 진행해 진보당 인사들의 지역·중앙 정치 진출 길도 터줬다.

이렇게 되면 더불어민주연합 비례후보로 당선권에 배치된 정혜경·전종덕·손솔 씨 외에도 수십 명의 진보당원이 보좌관·비서관으로 국회에 들어올 것이다. 국회의원 재선거로 진보당 강성희 의원이 국회에 입성했을 때 정보위·외교통일위·국방위원회 배치는 국가기밀 유출 우려 등을 이유로 배제됐지만, 제22대 국회에서는 그렇게 차단하기 어렵게 된다. 이들은 국회를 종북 투쟁의 장으로 활용하려 들 것이기 때문에 대의제 민주주의의 원칙도 훼손될 것이다.

동서독 분단시대 서독에선 공산당과 나치 후신 정당인 사회주의국가당이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해산됐을 정도로 공산주의 및 극단주의 세력에 단호했다. 서독 정부는 동독 정부와 대화를 진행하며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정보부의 방첩·감청 활동 등은 더욱 강화했다. 서독 정보부가 동독의 고정간첩 기욤을 적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족 등 주변 인사에 대한 단파 라디오 감청 등을 20여 년에 걸쳐 치밀하게 진행해온 덕분이다.

당시 서독과 비교할 때 대한민국의 방첩 시스템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 문재인 정부는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을 없앰으로써 사실상 국가보안법을 무력화했다. 경찰에 업무를 이관하는 형식이었지만 경찰은 간첩 추적 역량이 떨어진다. 더구나 외국의 국가안보 간첩 행위를 처벌할 반(反)간첩법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형법 제98조엔 ‘적국을 위해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만 기술됐다. 간첩 행위라는 구성 요건이 불확실해 간첩 혐의자들을 제대로 처벌하기 힘들 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등 외국의 스파이 행위엔 적용도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당 소속 의원·보좌관·비서관들이 여의도를 휘젓고 다니게 됐다. 민주당이 선거연대를 통해 진보당원들에게 국회 진출 레드 카펫을 깔아주면서 종북파 인사들의 투쟁 무대는 시민단체 수준에서 전국 단위 정치권으로 확장됐다. ‘한국판 귄터 기욤’이 집단적으로 합법적인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어렵게 쌓아 올린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북한을 추종하는 통진당 후예들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

서독은 스파이 기욤 스캔들 이후에도 민주주의를 지키며 1990년 독일 통일을 이뤄냈지만, 우리는 훨씬 취약한 구조다. 현실적으로 종북 세력의 진출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유권자들이 냉철하게 판단해 투표해야 한다. 앞으로 4년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를 지키기 위해 종북 세력과 어려운 싸움을 해야 하는 시기다. 마음 단단히 먹고 치밀하게 대응해 서독처럼 승리해야 한다.

이미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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