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50억원 받은 대문장가의 사회장은 왜 역풍 맞았을까

한겨레21 2024. 3. 27.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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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의 역사극장]1922년 신문에 등장한 동우회선언, 조선 노동자 계급투쟁의 서막을 열어젖힌 기념비적인 문서
<조선일보> 1922년 2월5일치 4면에 실린 ‘동우회선언’. 임경석 제공

3·1운동이 일어난 지 3년째 되던 1922년이었다. 해가 바뀌고 한 달 남짓 지났다. 2월5일치 <조선일보> 지상에 주목할 만한 광고가 실렸다. 4면 아랫부분에 2단에 걸쳐 넓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같은 페이지에 대문짝처럼 실린 상업광고, 대력환(大力丸)이라는 강장제를 선전하는 약광고 크기와 거의 동일했다.

이채로운 광고였다. 상업적 이익을 목표로 하는 다른 광고들과는 달랐다. 다른 광고란을 채우는 상품은 약품, 영화, 서적, 병원, 악기, 수입품 등이었다. 그에 반해 우리가 주목하는 문제의 광고는 ‘전조선 노동자 제씨에게 격(檄)하여’라는, 뜻밖의 제목을 달고 있었다.1 

계급투쟁 실행을 공공연히 선포

내용을 들여다보자. ‘사회개조운동’의 토대를 쌓으려 두 가지 사업을 하겠다고 한다. 하나는 ‘노동대학’을 설립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동우>라는 이름의 잡지를 발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지도 밝혔다. 종래에는 노동자와 고학생들의 상호부조를 도모하는 구제기관이었는데, 이제 그 깃발을 버리겠다고 한다. 그 대신 ‘전 조선 노동자의 직접 운동을 위한 투쟁 기관’이 되겠다는 다짐을 표명했다. 자신의 존재 의의는 ‘노동자 계급투쟁의 실행 기관’이 되는 데 있다고 선언했다. 이채롭다. 신문 지면을 통해, 그것도 광고란을 빌려서 계급투쟁을 다짐하는 글을 발표한 것은 이전에는 좀체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이처럼 노동자 계급투쟁의 실행을 공공연히 선포한 것은 한국 근현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광고를 냈단 말인가. 이 의문을 해소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광고 지면에 이미 드러났기 때문이다. ‘재일본동경노동단체동우회’라는 단체 명의였다. 그뿐인가. ‘현재 주요한 회원’이라는 타이틀 아래 12명의 성명이 소속 단체와 함께 열거됐다. 거기에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마르크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가 포함됐다. 노동운동이라는 테두리 안에 두 이념이 공존했음을 보여준다. 그 사람들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존재는 김사국이었다. 그는 다른 인물들이 일본으로 곧 되돌아간 데 반해 이후 줄곧 고국에 눌러앉았다. 그뿐 아니라 조선 국내에서의 노동자 계급투쟁을 앞장서서 실행에 옮겼다.

‘동우회선언’이 수록된 신문 지면, <조선일보> 1922년 2월5일치 4면. 임경석 제공

사람들은 조선 노동자 계급투쟁의 서막을 열어젖힌 이 문서를 ‘동우회선언’이라고 줄여 불렀다. 조선 국내에서 노동계급의 정체성을 공공연하게 대중적으로 표명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유럽 사회주의 운동사 속에서 ‘공산당선언’이 점하는 것과 비슷한 지위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한 달 전 조선에 건너와 무산자동맹회의 등 출현에 관여

이 특이한 광고는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았다. 경찰의 정보 문서에 따르면, 이 선언을 발표한 주체는 도쿄에 유학하는 조선인 유학생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학 경비가 부족해 부득이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하는 가난한 고학생이 다수였다. 이들은 2년 전 ‘고학생동우회’라는 상부상조 단체를 설립했다. 어려움을 서로 돕고 친목을 도모하는 단체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동안 사회주의 사조가 유학생 사회에 널리 퍼져나간 까닭에 이 단체는 급속하게 ‘좌경화’했다고 한다.2

경찰 첩보에 따르면 좌경화한 조선인 유학생들은 한 달 전인 1922년 1월 이미 조선에 건너왔다. 그 목적은 단순한 고국 방문에 있지 않았다. 조선 내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이들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 정보망에 포착된 바에 따르면, 조선에 되돌아온 이 유학생 사회주의자들은 ‘재서울 사회주의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서로 뒤섞였다. 사회주의사상을 고취하고 무산청년을 조직화함으로써 세력을 확장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해 첫 3개월 동안 서울에서 공개적으로 사상 연구를 표방한 ‘불온’한 단체가 연이어 결성된 것도 다 그들이 저지른 일이었다고 한다. 1월에는 무산자동지회가, 2월에는 신인동맹이, 3월에는 양자가 합해 무산자동맹회가 각각 출현했다.

3·1운동 때 총리대신에 청원서 제출한 ‘자작’

‘동우회선언’은 왜 하필 그 시점에 발표됐을까?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앞뒤 맥락에 눈길을 돌려보자. 단연 ‘김윤식사회장 사건’이 두드러진다. 이 사건은 1922년 1월21일 김윤식이 사망한 뒤 조선인 사회에서 전개된 ‘사회장’ 의례의 찬반을 둘러싼 논란을 가리킨다.

김윤식은 영욕이 교차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멸망 전 조선왕조의 고관이었다. 청국주재 영선사, 공조판서, 병조판서, 외무대신, 규장각 대제학, 중추원 의장 등이 그가 올랐던 직위다. 그러나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귀족 칭호를 받은 76명 가운데 하나가 됐다. 자작의 작위와 거액의 은사금 5만원을 수령했다. 오늘날 화폐 구매력으로는 50억원 이상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이를 더럽고 천한 행위라고 여겼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김윤식을 가리켜 “이리 붙고 저리 붙는 주의를 가지고 영위영작을 얻은” 자라고 욕했다.3

김윤식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은 한문학 문장과 생애 말년의 절개였다. 김윤식은 ‘조선의 대문장’이라는 수식어로 불리는 한문학자였다. 한편 말년의 절개란 1919년 3·1운동의 고조기에 김윤식과 이용직 두 사람의 귀족이 일본 총리대신 앞으로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한 행위를 뜻한다. 두 사람은 이 행위로 박해를 받았다. 김윤식은 2개월 동안 투옥됐다가 85살의 고령이라는 이유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형을 받고 풀려났다. 물론 작위도 박탈당했다. 이 때문에 다수의 조선인은 그를 독립운동 참가자로 인정했다.

김윤식 사후 사흘이 지난 1월24일, ‘김윤식사회장위원회’라는 단체가 결성됐다. ‘사회장’이라는 장례 형식과 명칭은 조선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사회장위원으로 위촉된 이는 86명이었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조선의 언론계, 교육계, 종교계, 법조계 기타 사회 각 계급’의 대표자들이었다.

‘동우회선언’에 참가하고 초기 사회주의운동을 이끈 김사국과 김한. 임경석 제공

김윤식 사회장 반대를 주도한 단체에도 이름 올려

쾌속으로 항진하던 김윤식사회장운동은 얼마 안 돼 역풍을 맞았다. 사회장위원회가 조직된 지 사흘이 지난 1월27일, 사회장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표출됐다. 급기야 ‘고김윤식사회장반대회’라는 단체가 결성됐다. 이 단체는 반대운동의 취지를 담은 ‘결의문’과 ‘선언’을 발표했고, 군중 강연회를 두 차례나 열었다. 군중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왜 반대하는가? 김윤식의 죽음이 사회장이란 의례로 기념할 만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귀족사회를 파괴하고 자본가계급 타파와 사회개량가의 매장”을 위한 계급투쟁을 수행한다는 목적의식을 뚜렷이 갖고 있었다.

‘동우회선언’을 발표한 사람들은 이때 서울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들은 김윤식사회장 사건에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단연 후자였다. 단지 반대하는 입장을 택했을 뿐만 아니라, 앞장서서 반대운동을 이끌고 나갔다.

보기를 들어보자. 김사국은 ‘사회장위원문책회’라는 기구를 조직하고 실행위원 1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취임했다. 2월3일에는 서울에서 사회장위원들을 문책하는 대중강연회를 개최할 예정이었는데, 그곳에는 김사국을 비롯해 동우회선언에 서명했던 인사가 세 사람이나 연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뿐인가. 2월1일 열렸던 사회장 반대 강연회에는 박광희가 등단해 열변을 토했는데, 그는 다름 아닌 김사국의 손위 처남이기도 했다. 즉, 아내 박원희의 오빠였다. 김사국의 친인척까지 보조를 같이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사국과 더불어 김윤식사회장반대운동에 두각을 나타낸 이는 김한이었다. 그는 사회장반대회 결성을 이끌었고, 대중강연회에도 연사로 등단했다. 선전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김윤식사회장반대운동의 논리를 신문에 기고했고, ‘동우회선언’에 서명한 인사 5명과 이름을 나란히 하여 ‘소위 김윤식사회장이란 유령배의 참칭 사회장을 매장하라’라는 격렬한 격문을 발표하기도 했다.4

김사국과 김한은 김윤식사회장반대운동의 양대 지도자였다. 일본 경찰의 정보 분류를 따른다면 김사국은 ‘도쿄에서 돌아온 유학생 사회주의자들’을 대표하고, 김한은 ‘재서울 사회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셈이었다. 초기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했던 조봉암은 이들을 가리켜 ‘양웅’이라고 지칭했다. 두 사람은 스타일과 개성이 달랐다. 김한은 책사(策士)형이고, 김사국은 투사(鬪士)형이었다.5

두 사람이 ‘양웅’이라는 평가를 받은 구체적인 계기가 바로 1922년 1~2월의 김윤식사회장반대운동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선언 뒤 비밀결사는 이후 조선공산당으로

‘동우회선언’은 조선 국내에서 사회주의운동이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한 지표였다. 그것은 같은 시기 전개된 김윤식사회장반대운동과 맥락을 같이했다. 또 합법 공개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상단체 ‘무산자동지회’ ‘신인동맹’ ‘무산자동맹회’의 결성과도 긴밀히 연관됐다.

이런 연관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목적의식성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상이한 각 방면의 행동을 통일하는 강력한 구심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이었다. 이 당의 집행부는 7명으로 구성됐는데, 김사국과 김한이 둘 다 포함됐다. 뒷날 1925년에 결성돼 국제공산당 지부로 가입하는 조선공산당과 명칭이 동일하기 때문에, 1922년에 결성된 이 비밀결사는 ‘중립당’이나 ‘내지당’이란 별칭으로 곧잘 불린다. 요컨대 ‘동우회선언’은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중립당)의 결성을 상징하는 기념비적 문서임을 알 수 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참고문헌

1. 재일본동경노동단체동우회, ‘全鮮노동자 제씨에게 檄하여’, <조선일보> 1922년 2월5일, 4면

2. 경기도경찰부, <治安槪況>, 248쪽, 1925년 5월

3. ‘사회장반대파가 맹렬히 일어나서 극렬반대’, <매일신보> 1922년 1월19일

4. ‘고 김윤식씨 사회장 반대에 즈음하여 이 글을 일반 민중에게 보낸다’, <조선일보> 1922년 2월3일.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諺文新聞差押記事輯錄 (朝鮮日報)> 조사자료 제30집, 1932년 6월, 58~61쪽 수록. 재동경 신인동맹, ‘민중의5. 격, 소위 김윤식사회장이란 유령배의 참칭 사회장을 매장하라’, <매일신보> 1922년 2월2일

5. 조봉암, ‘내가 걸어온 길’, <죽산 조봉암 전집> 1, 344~345쪽,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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