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달 크라운해태 회장 “제과도 문화산업… 제품 이름부터 포장까지 예술성 담아”

권이선 2024. 3. 26.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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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경영’ 이끄는 윤영달 크라운해태 회장
과자를 판다는 건 꿈·행복을 파는 일
2004년 점주 대상으로 첫 국악공연
우호적 시각 늘며 매대 확장 이어져
2007년 업계 첫 국악관현악단 창단
재능 있는 국악 영재 발굴도 힘써와
최정상급 국악 명인 공연 지속 개최
‘오예스’ 포장에 ‘백만송이 장미’ 눈길
‘쿠크다스’엔 물결 모양 동세도 넣어
예술적 감성 담아내 고객 만족 키워
예술 지원 일방적인 ‘메세나’는 아냐
기업뿌리 튼튼하게 하는 마케팅 일환
예술·기업 공존공생하며 저변 넓혀야

4년 만에 화의에서 벗어나 몸집이 두 배가량 큰 회사를 덜컥 인수했을 때에도, 업계에 불어닥친 멜라민 파동 때에도, 그놈의 예술을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니, 돈을 벌어도 모자를 판에 왜 예술에 회삿돈을 쓰냐고?

그러니까 1998년, 한보나 대우, 기아 같은 기업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던 때였다. 2억원을 막지 못해 회사는 부도처리가 됐다. 죄인의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시절이었다. 북한산을 오르다 숨을 고를 겸 바위에 걸터앉아 있을 때 희미한 선율이 들렸다. 구슬프면서도 청아하고, 시원하면서 평화로운. 그게 대금 소리였다는 걸 알게 된 건 후일이었지만, 그날은 윤영달 크라운해태 회장이 20년 넘게 이어온 ‘예술경영’ 자장(磁場)의 시작점이었다.

윤영달 한국메세나협회장이 지난 21일 서울 용산구 크라운해태 사옥에서 과자 ‘쿠크다스’의 물결무늬를 보여주며 예술경영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과자를 판다는 건, 그에겐 꿈과 행복을 파는 일이었다. 업계는 고객 세분화, 가격 경쟁, 혁신기술 같은 것에 주목했으나,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기계가 좋아 과자 포장 공장부터 자동차부품 공장까지 직접 운영해 본 그의 눈에 제과산업의 성장은 이미 한계에 부딪힌 상황이었다. 대신 그는 과자의 본질과 예술적 욕망에 주목했다.

“2003년 화의 종료를 기념해 이듬해 점주들을 대상으로 국악공연을 열었어요. 영업사원들에게 공연 티켓을 몇 장씩 나눠 주면서 영업에 활용하라고 했죠. 회사에서는 왜 그런데 돈을 쓰냐고 반발이 터져 나왔어요. 근데 막상 공연시간이 임박하자 보조의자까지 마련해야 할 정도로 인파가 몰렸어요. 슈퍼마켓을 하는 아들에게 티켓을 받아 온 부모님들, 그리고 그 지인들까지…. 그날 이후부터 회사 영업사원을 대하는 표정이 우호적으로 변했어요. 제과업계 4위이던 회사가 상위권 회사를 제치고 매대를 자연스럽게 확보하게 된 거예요.”

그렇다고 그가 예술 부흥만을 바라는 자선사업가는 아니다. 윤 회장은 예술분야에 대한 지원을 일방적인 ‘메세나’(Mecenat·기업의 문화예술 지원을 통한 사회공헌활동)가 아닌 ‘마케팅’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예술을 후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원들에게 창(唱)을 부르게 하고, 조각을 하게 하고, 시를 쓰게 했다. 직원들이 예술가가 되자 과자는 예술품이 됐다. 실제 회사가 만든 제품의 이름부터 포장까지에는 철저히 계산된 예술성이 깃들어 있고, 예술을 매개로 한 영업활동으로 수익성도 크게 개선됐다. “제과산업은 문화산업이며, 문화 경쟁력이 바탕이 돼야 고객을 유치할 수 있다”는 게 그의 경영 지론이다.

이를 바탕으로 크라운해태제과는 2007년 민간기업 최초로 국악관현악단인 ‘락음국악단’을 창단해 운영하고 있으며, ‘영재한음(국악)회’를 통해 재능 있는 국악 영재 발굴에도 힘쓰고 있다. 또한 최정상급 국악 명인들의 ‘대보름명인전’을 2008년부터, 크라운해태 직원들이 직접 무대에 오르는 국내 최대 국악공연 ‘창신제’를 2004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다.

윤 회장은 오랜 시간 예술경영을 해온 이력으로 지난 2월 한국메세나협회 12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모든 고객을 행복하게 만드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예술”이라고 주창해온 윤 회장의 기업 예술지원 행로는 어떻게 될까. 윤 회장을 지난 21일 ‘사랑가’ 가락이 울려 퍼지는 서울 용산구 크라운해태 사옥에서 만났다.

―근무시간에 직원들이 책상이 아닌 지하 연습실에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북을 두드리고, 부채를 흔들며 소리를 하는 직원들을 보며 덩실덩실 몸을 흔들며 ‘얼쑤’ 장단을 맞추던데.

“코로나19로 사내 동아리 활동이 중단됐다가 최근에야 다시 직원들이 모여서 연습을 시작하게 됐다. 근무시간에 조각품을 만들고 판소리를 연습한다고 하니 다들 회사가 어떻게 굴러가냐고 한다. 하지만 근무 분위기는 오히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근무시간에 예술을 하다 보니 일을 할 때는 확실하게 집중을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더라. 직원들은 창의적 활동을 통해 몰입을 높이고, 예술가로서 활동한다는 자부심도 갖게 됐다. 즐기지 않으면 하지 못하는 일들이다.”

―이윤추구를 목표로 하는 기업이 직접적인 수익이 나지 않는 예술분야를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직원들을 가르칠 전문가들을 모셔오고, 공연이나 전시를 활성화하면서 쓴 돈이 아마 수백억원에 이를 것이다. 우리 직원들은 매년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고, 겨울이 오면 눈 조각을 만든다. 우수한 사원에겐 아트바젤이 열리는 스위스나 홍콩을 방문할 수 있는 특혜도 주어진다. 물론 1차원적으로 생각하면 이 비용을 아까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회사 광고 등을 일절 하지 않고 그 돈을 직원들에게 투자한 것이다. 그렇게 투자한 건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예술지원은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뿌리가 됐다.”

―예술경영이 기업 경영 성과로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오예스’ 포장에 화가 심명보의 ‘백만송이 장미’를 그려 넣었더니 제품 진열만으로도 예술작품이 만들어졌다. 밋밋한 과자였던 ‘쿠크다스’에 초콜릿으로 맥을 짚어가며 물결 모양의 동세를 주었더니 매출이 두 배가량 뛰어올랐다. 과자에 살짝 조각을 했을 뿐인데 소비자들의 반응은 달랐다. 우리 제품의 디테일에는 알게 모르게 예술이 녹아 있고, 이는 고객들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또 이 예술경영의 산물을 1차 고객인 도소매 점주들에게 제공하며 파트너십을 강화하자 자연스레 매출로 이어졌다. 처음엔 영업사원들에게 유머를 외우게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유머가 저속해지더라. 그래서 영업사원들을 불러다가 시 강의를 듣게 하고, 시작(詩作)을 배우게 했다. 협력사와의 술자리에서 시낭송을 하니 회사 이미지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모른다. 충동구매 상품, 저관여 상품을 만드는 제과업계에서는 진열 위치를 결정하는 사람의 파워가 가장 중요한데, 점주에게 점수를 따니 매출은 절로 따라왔다. 이렇게 직원들이 쓴 시를 책으로 엮었더니 벌써 책장이 빼곡해졌다.”
윤영달 한국메세나협회장이 지난 21일 서울 용산구 크라운해태 사옥 외부에 전시된 니키 드 생팔의 ‘돌고래를 탄 나나’ 조각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기업들이 딥테크, 인공지능(AI)과 같은 신기술을 무기로 체질변화에 나서고 있는데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우리 인간은 절대 디지털화가 될 수 없는 존재다. 과자 산업은 감정, 감각산업이기 때문에 풍부한 감각을 잘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술적 감성을 담아내 고객에게 행복감을 안겨 줘야 한다. 모든 회사가 비슷한 연구를 거쳐 비슷한 기술로 비슷한 상품을 내놓고 있는 제과시장에서 차별화를 둘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술이다. 제일 중요한 건 직원들의 예술감성이며, 직원들이 신나고 경쾌하게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 최고 명인명창으로 구성된 양주풍류악회의 정기공연이 벌써 100회를 맞았다. 전통음악 원형을 계승하면서도 신선한 시도로 국악을 발전시켰다는 평이 나온다.

“양주풍류악회는 국내뿐만이 아니라 일본과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베트남, 몽골 등 세계를 돌며 국악의 독창성과 예술성을 알려왔다. 지난 7일에 100번째 무대에 올라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향악 중 가장 오래된 수제천에 구음을 접목하는 시도를 해봤다. 고전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만큼 주변 전문가들에게 조언과 자문을 구했다. 다행히 다들 우리 음악이 더 웅장해지게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는 답을 줬다. 덕분에 수제천의 원곡이 백제가요 정읍사에서 시작한 노래였던 만큼 구음으로 원형에 가까워졌고, 마치 서양의 오페라처럼 소리가 풍성하고 웅장하게 느껴졌다고들 말한다.”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 규모가 선진국에 비해 미미한 데다 경기불황과 팬데믹 등을 겪으며 사회적 관심이 시들해진 것 같다. 메세나를 확장시킬 신임 회장의 계획은.

“메세나를 둘러싼 오해들이 있는 것 같다. 먼저 메세나라는 이름은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들을 돕고 마치 르네상스를 일으켜야 할 것 같은 거창한 선입견을 준다. 그러나 메세나는 기업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생존전략이자 사회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행위다. 예술인들은 돈을 구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예술을 많은 사람이 즐기고 향유하면서 인정받는 기회가 필요한 것이다. 메세나 회원사들에게 우선 사내에 예술동아리를 만들어서 뭐든지 시작하라고 할 계획이다. 그러면 예술가는 공연이나 강의의 기회가 확대될 것이고, 회원사들은 예술가로 거듭나게 된다. 예술가와 기업이, 회원사와 회원사가 공존공생하며 자연스럽게 저변이 확대되고 풍토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담=나기천 산업부장, 정리=권이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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