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아버지

2024. 3. 26.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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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 트자." 아버지가 주판을 꺼내셨다.

아버지가 금액을 부르시며 큰 검정 주판을 놓고 나는 아버지가 부르는 금액을 내 작은 주판으로 계산했다.

아버지는 나와 계산을 맞춰보며 나를 대견한 듯 보셨다.

맏이이며 초등학생이던 나는 "계산 트자" 후 아버지께 혹시 호랑이나 여우를 직접 본 적이 있느냐고 여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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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 트자." 아버지가 주판을 꺼내셨다. 아버지가 금액을 부르시며 큰 검정 주판을 놓고 나는 아버지가 부르는 금액을 내 작은 주판으로 계산했다. 아버지와 내 금액이 일치하면 "됐다. 가서 자그라" 하셨다. 아버지는 나와 계산을 맞춰보며 나를 대견한 듯 보셨다. "니는 내 젖 많이 먹고 컸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엄마는 그렇다고 했다. 연년생 동생이 태어나 엄마는 바빴다. 나에게 아버지 젖을 물리셨다. 나는 아버지 젖을 먹었다. 처음 이가 날 때는 침을 흘리고 근질거려 아버지 젖꼭지를 새 이가 나고 있는 앞니로 물어뜯었다. "아이고, 우야노." 엄마는 내가 젖꼭지를 삼켰을까 봐 입안에 손을 넣어 찾기도 하고 토하게도 했다. 결국 아버지 배꼽 근처에서 젖꼭지를 찾았다. 젖꼭지를 피가 나는 아버지 젖 가운데에 붙였다. 아버지 젖꼭지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 자리에 잘 붙었다고 한다.

맏이이며 초등학생이던 나는 "계산 트자" 후 아버지께 혹시 호랑이나 여우를 직접 본 적이 있느냐고 여쭤보았다. 아버지는 시골에 사셨고 옛날이라 한 가지쯤은 보셨을 수도 있지 싶었다. 아버지는 호랑이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늑대는 직접 보셨다고 했다. 산에서 보셨다고 했다. 그 개는 등에 기름기가 반질거리고 허리가 곧게 잘생겼다. 시골이라 누구네 집에서 기르는 개인지 알 수 있었는데 그 개는 마을에서 본 적이 없는 개였다. 아버지는 옆에 있는 줄로 둥글게 고리를 만들어 개가 오면 목에 걸어 집에 데리고 오려고 했다. 아버지는 서서히 개를 쳐다보며 뒷걸음으로 한 발짝씩 산에서 내려오고 개도 천천히 아버지 걸음에 맞춰 따라왔다. 마을 어귀에 다다랐을 때 밭에서 일하던 어른들이 "늑대다. 늑대다. 야야" 소리를 치며 돌멩이를 들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 줄을 든 채 엉덩방아를 찧고 개는 아니 늑대는 커다란 나무를 훌쩍 뛰어넘어 거의 날아서 산으로 갔다. 그때의 일이 가끔씩 꿈에 나타난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술을 엄청 좋아하셨다. 장판 벽지 창호지 등 종이를 소분하여 지물포에 팔면서 많은 거래처 사람들을 만났다. 아버지는 사람들을 좋아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술을 샀다. "한잔하세." 아버지가 말했을 때 싫다고 돌아서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 슬퍼서 눈물이 난다고 했다. 아버지의 "계산 트자"가 끝나면 아버지는 취한 목소리로 나에게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다. 가계부를 쓴 어느 달에 주대가 가장 많았다. 주대는 술값이다. 아버지는 "내 술값이 너무 많다 줄여야지"라고 하셨다. 어린 나는 아마도 우리 집은 가난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술값 때문에.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에도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술병이 났다. 간이 나빠져서 입원을 하기도 했다. 간경화, 간암으로 고생하면서도 술은 좋아하셨다. 나는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만 했다. 가시는 술집들을 모두 돌았다. 사장님들에게 부탁을 했다. 내 아버지가 오시면 술을 드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 얼마씩을 맡기고 내 아버지가 오시면 술 말고 식사를 드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 병을 그분들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아무도 나에게 술을 팔지 않는다며 "니가 그랬나? 나 술 주지 말라고."

[권명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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