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폭 넓히는 행동주의 펀드] 찻잔속 태풍 그쳤지만… 여전히 떠도는 `기업 주무르기` 망령

김수연 2024. 3. 25.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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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깃기업 소수지분 매입후 주총서 영향력 행사
최근 韓·日 등 글로벌 행동주의펀드 공격 늘어
국내기업, 자사주 매입 외 별다른 방어수단 없어

행동주의 펀드들의 한국 기업 경영권 흔들기가 올해도 계속됐지만, 지금까지는 '찻잔 속 태풍'에 그치는 모양새다.

지난 22일 열린 금호석유화학 정기 주주총회에서 박철완 전 상무와 연대한 차파트너스의 자사주 소각 요구는 부결됐고, 이에 앞서 지난 15일 삼성물산 주총서도 시티오브런던 등 5개 행동주의 펀드 연합이 삼성물산에 요구한 5000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과 배당 안건도 소액주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오는 28일 열릴 KT&G와 JB금융지주 주총서도 행동주의펀드의 안건은 부결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올해는 국민연금과 소액주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기업 흔들기에 실패하는 모양새지만, 국내 기업을 향한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들의 소위 '울프팩(Wolf Pack, 늑대 무리)' 공세는 해가 갈수록 더 거세지고 있다. 울프팩이란 여러 펀드들이 증권시장과 금융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지분 대량보유 공시의무(美 10%, 韓 5%)' 미만의 지분을 갖고 있다가, 일시에 타깃 회사를 함께 공격하는 전술이다.

이와 관련, 한국경제인협회는 김수연 법무법인 광장 연구위원에 의뢰한 '주주행동주의 부상과 과제' 보고서를 25일 공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에 행동주의펀드의 공격을 받은 한국기업 수는 77개로, 코로나 직전인 2019년(8개) 대비 9.6배 증가했다.

이는 데이터 리서치 업체 딜리전트가 조사를 실시한 23개국 중 미국(550개), 일본(103개)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수치다. 조사에 의하면 2023년 조사대상 23개국에서 총 951개 회사가 행동주의펀드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는 2022년 875개사보다 8.7%, 2021년 773개사보다 23% 증가한 수치다.

행동주의 펀드는 타깃 기업의 소수 지분을 매입한 뒤 경영진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다른 주주를 설득하거나 주주총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기업과 적대관계를 형성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아시아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행동주의펀드 공격은 2023년 총 214건 발생해, 전년도 184건보다 16.3% 늘었다. 같은 기간 북미는 9.6% 증가한 반면, 유럽은 오히려 7.4% 감소했다.

피공격기업 급증 추세를 보이는 한국, 일본과 달리 영국, 독일 등은 감소세이고, 미국·캐나다는 2021년까지 감소하다가 다시 증가하고 있어서, 글로벌 행동주의펀드의 공격이 한국, 일본 등 아시아권에 집중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김 연구위원은 행동주의 대응에 익숙하지 않은 아시아 기업이 글로벌 행동주의펀드의 손쉬운 먹잇감이 된 것으로 풀이했다.

사모펀드(PE)나 일반 기관투자자들도 수익률 제고의 수단으로 배당·자사주 매입 확대 요구, 위임장 대결, 기존 이사회 멤버 교체 요구 등 행동주의 전략을 활용하면서, 행동주의펀드와 일반 기관투자자들 간의 경계도 모호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앞으로 헤지펀드, 행동주의펀드, 사모펀드 등 각종 투자자들 간의 수익률 제고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추세라, 기업들이 받는 압박 수위는 더 높아질 것으로 전망됐다.

최근 미국에서는 하나 이상의 행동주의펀드들이 타깃 기업을 동시에 공격하는 '스와밍(Swarming)' 사례가 2020년 7건에서 2021년 9건, 2022년 17건으로 늘어나고 있는 만큼 앞으로 기업들의 대응이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스와밍이란 비슷한 시기에 복수의 행동주의펀드가 (사전모의 없이) 동일한 타깃기업을 상대로 각각 독자적인 전략과 기대수익률을 목표로 공격하는 방식이다.

김 연구위원은 한국 자본시장이 참여자의 자율성보다 정부 규제가 강하고 여기에 자본시장 큰 손인 국민연금도 정부 영향력 하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 행동주의펀드 압박까지 심화되면 일본처럼 상장폐지를 결정하거나 상장 자체를 기피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경우 글로벌 행동주의펀드의 집중공격에 시달리자, 아예 회사를 비공개로 전환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국기업의 경우 글로벌 행동주의펀드의 타깃이 되면서 적대적 M&A 시도나 경영권 위협이 늘어날 전망이지만, 기업들에게 자사주 매입 이외에 별다른 방어수단이 없는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김수연 연구위원은 "기업들도 기관투자자와의 소통을 활성화해야 하나, 정부도 행동주의펀드의 지나친 공격에 기업들이 대응할 수 있는 방어수단을 제도화해야 한다"면서 "주주행동주의 부상 등 기업을 둘러싼 환경이 빠르게 변하는 만큼, 정부도 지배주주 견제와 감시 프레임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기업이 장기적 관점에서 성장하고 가치를 제고할 수 있도록 제도를 균형있게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수연기자 newsnew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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