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에 대한 얘기 할 게 없다”는 아본단자의 혹평…김연경만 빛나는 흥국생명, 이대로는 ‘100% 확률 저주’의 2년 연속 희생양 된다

남정훈 2024. 3. 25.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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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은데, 배구에 대한 얘기를 할 게 없을 정도다. 우리가 한 건 배구가 아니었다”

흥국생명의 마르첼로 아본다 감독이 24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2023~2024 V리그 여자부 플레이오프 2차전을 마치고 남긴 말이다.
지난 22일 인천 홈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1차전을 세트 스코어 3-1로 승리한 흥국생명은 ‘확률 100%’를 거머쥐었다. 이번 플레이오프 이전에 열린 역대 17번의 여자부 플레이오프에서 1차전 승리팀이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할 확률은 100%였다.

1차전 승리 뒤에 이 확률에 대해 아본단자 감독은 “믿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지난 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도 1,2차전을 잡으며 확률 100%를 잡았지만, 3,4,5차전을 내리 내주며 사상 초유의 리버스 스윕 패배의 희생양이 됐던 게 흥국생명과 아본단자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2차전을 앞두고 이에 대해 다시 한 번 ‘농담인가, 진짜인가’라고 묻자 아본단자 감독은 “농담이 아니다. 경기는 끝날 때까지 모른다”라면서 “1차전도 승리하긴 했지만, 경기력은 좋지 않았다”고 경계했다.

아본단자 감독의 말대로 어쩌면 또 다시 100% 확률의 저주에 2년 연속 시달릴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흥국생명은 지는 경기의 전형을 보여줬다.

배구의 첫 걸음인 리시브부터 크게 흔들렸다. 정관장 선수들이 때린 서브(90개) 중 68.89%인 62개가 아웃사이드 히터 레이나(35개)와 리베로 도수빈(27개)에게 향했다. 흥국생명의 주전 리시브 라인인 김연경-레이나-도수빈 중 김연경의 리시브 능력이 가장 뛰어나기에 레이나와 도수빈에게 집중적으로 목적타를 날려 공격의 예봉을 꺾겠다는 전략이었다.
목적타 세례는 적중했다. 레이나의 리시브 효율은 31.43%에 그쳤다. 35개를 받아 세터 머리 위에 정확하게 전달한 것은 13개에 그쳤다. 여기에 서브에이스 2개를 허용했다. 문제는 정확하게 연결한 것과 에이스를 허용한 리시브를 뺀 나머지 20개 리시브다. 정확으로 판정받지 못하더라도 어택 라인 근처에 올려 오픈 공격이라도 올릴 수 있게 하는 리시브를 해줘야 하는데, 크게 빗나가 오픈 공격조차 시도하지 못하고 그대로 토스로 넘겨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꽤 자주 나왔다. 리시브가 흔들린 레이나는 공격에서도 제 역할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29.03%의 공격 성공률로 10점에 그쳤다.

리베로 도수빈은 레이나보다 더 흔들렸다. 도수빈의 리시브 효율은 25.93%로 팀 리시브 효율 평균(26.67%)보다 더 낮았다. 팀 리시브를 끌어올려줘야 할 리베로부터 흔들렸으니 흥국생명의 공격이 잘 풀릴 리 만무했다.

윌로우는 공격 코스가 크로스나 반크로스로 단순하다. 직선 코스를 거의 때리지 못한다. 게다가 좋지 않은 토스나 이단연결 볼을 달래서 때리는 능력도 떨어진다. 때리기 좋게 잘 올려줘야만 왼손잡이 장점을 살려 공격 성공률을 높일 수 있는 타입이다. 리시브가 흔들리다 보니 윌로우에게 올라가는 공도 좋지 못했다. 1차전에선 김연경(23점)보다 더 많은 25점을 올리며 후위에선 리시브와 수비에 집중하는 김연경을 대신해 화력을 담당해줬던 모습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었다. 공격 성공률은 28.57%에 그쳤고, 11점에 범실은 6개. 득실 마진이 +5에 불과했다. 레이나와 윌로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흔들리니 김미연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교체 멤버로 나서야했다. 아본단자 감독은 4세트엔 아예 선발 아포짓에 윌로우를 빼고 김미연을 투입할 정도였다.
리시브가 흔들린 탓도 있지만, 세터 이원정의 토스도 1차전과 달리 들쑥날쑥했다. 1세트 초반엔 속공을 적극 활용하며 양날개 의존도를 낮추려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이후 양질의 리시브를 제공받지 못하다 보니 어느새 양날개에 의존하는 단순한 공격 패턴의 반복이었다.
정관장의 세터 염혜선이 지아의 파이프 공격 옵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흥국생명 블로커들을 흔든 반면 이원정은 김연경의 백어택 옵션을 거의 활용하지 못했다. 1차전에 김연경이 시도한 백어택은 단 3개에 그친 것을 대해 2차전을 앞두고 아본단자 감독에게 묻자 “연습할 때 김연경의 백어택을 훈련하고 있다. 팀 차원의 백어택 옵션 봉쇄가 아닌 세터의 선택 문제”라고 답한 바 있다. 2차전에선 김연경의 백어택은 1차전보다 한 개 늘어난 4개를 시도했다. 1차전에선 성공 개수가 0개였다면 2차전에선 2개로 늘어났다. 흥국생명의 백어택은 윌로우의 라이트 백어택에 거의 치중됐다. 전체 공격 146개 중 백어택 활용이 단 15개였다. 10%를 갓 넘는 수준밖에 활용하지 못하면 정관장 블로커들은 전위 공격수의 블로킹에만 신경쓰면 되기에 수 싸움에서 한결 편해지는 결과가 나온다.
미들 블로커 김수지, 이주아도 이날은 블로킹 4개 포함 8점을 합작하는 데 그쳤다. 공격이야 이원정이 워낙 속공이나 이동공격 옵션을 활용하지 못해서 시도 자체를 많이 못했기에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아본단자 감독은 김수지와 이주아에게 메가와 지아가 연타 페인트를 많이 시도하는 것에 대해 견제와 수비를 해달라고 지시했지만, 메가와 지아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블로킹 뒤에 떨어뜨린 연타 페인트로 흥국생명 코트를 유린했다.
흥국생명 선수들 중 잘 한 선수는 딱 한 명, ‘배구여제’ 김연경이었다. 그렇게 리시브가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공격 성공률 50%를 기록하며 팀 내 최다인 22점을 몰아쳤다. 흥국생명이 셧아웃 패배를 당하지 않고 한 세트라도 딸 수 있었던 것은 3세트에 김연경이 혼자 10점을 몰아치는 ‘원맨쇼’를 발휘해줬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토스가 흔들려 올라와도 상대 블로킹과 수비 움직임을 보며 다양한 코스와 연타, 강타를 섞어 때리는 김연경은 왜 자신이 여전히 세계 최고수준의 아웃사이드 히터로 꼽히는지를 보여줬다. 그런 김연경도 사람인지라 4세트 막판 아예 때릴 수 없는 토스가 올라오자 점프도 못하고 제 자리 강타를 때릴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순간에는 풀리지 않는 경기력에 대한 짜증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흥국생명의 전체적인 경기력이 좋지 못했다.
아본단자 감독은 “김연경을 제외하면 모든 선수들이 경기력이 좋지 못했다”라면서 “배구에 대해 논할 게 없는 경기다. 오늘 경기에서 우리의 적은 정관장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였다”고 혹평을 남겼다.
에이스 혼자 골을 성공시킬 수 있는 농구와 달리 배구는 아무리 최고의 에이스를 보유하고 있어도 그가 혼자 리시브를 받고 토스해서 때릴 수 없다. 김연경을 보유했다는 장점을 100% 발휘하기 위해선 나머지 선수들의 분발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흥국생명은 또 한 번 김연경의 전성기를 낭비하며 ‘100% 확률의 저주’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른다.

대전=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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