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갈 이유 있나요"...중국 MZ '인증샷 성지' 떠오른 옌볜대 '한궈창' [칸칸 차이나]

조영빈 2024. 3. 25.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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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선족 거리에 열광하는 중국 MZ
관광 불모지 옌지 옌볜대 앞 '한궈창' 유명세
"한국 드라마 속 들어온 것 같다" 입소문에
옌지시 관광 수입 250% 폭증 '행복한 비명'
경제난 속 한궈창 방문으로 한국 여행 대체
편집자주
5,000년간 한반도와 교류와 갈등을 거듭해 온 중국. 우리와 비슷한가 싶다가도 여전히 다른 중국. 좋든 싫든 앞으로도 함께 살아가야 할 중국. '칸칸(看看)'은 '본다'라는 뜻의 중국어입니다. 베이징 특파원이 쓰는 '칸칸 차이나'가 중국의 면면을 3주에 한 번씩 보여 드립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지난달 20일 지린성 옌지시 옌볜대 정문 앞에서 한글 간판 수십 개가 붙은 대형 상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이곳은 최근 1~2년 새 '한궈창(한국의 벽)'이라는 별칭까지 붙으며 중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증샷 성지로 떠올랐다. 옌지=조영빈 특파원

중국 지린성 옌지시의 옌볜(延邊)대 앞에 있는 대형 상가 건물이 별안간 중국 MZ세대의 인증샷 성지로 떠올랐다. 한국인에게 옌볜 지역은 중국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 중심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중국 내에서 특별히 선호되는 관광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1, 2년 새 상황이 급변했다. 밤마다 수십 개의 '한글 간판'이 빛을 뿜으며 서울의 밤거리와 똑같은 인상을 주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한족(漢族) 젊은이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다. 덕분에 중국에서 변방 취급받던 옌지는 밤마다 중국의 유명 연예인과 전국의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별다른 이름조차 없었던 옌볜대 앞 상가는 '한국의 벽'이라는 뜻의 '한궈창(韓國墙)'이라는 별칭까지 붙으면서 중국 동북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변모했다.


인증샷 찍으러 몰려든 한족 MZ

중국 지린성 옌지시 옌볜대 앞이 인증샷을 찍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바이두 캡처

지난달 20일 오후 9시 옌볜대 정문 앞. 최소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휴대폰을 들고 한궈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길이 150m, 높이 33m의 한궈창은 사실 6~8층짜리 상가 건물이다. 그런데 '길림성황 미술관', '뮤직박스', '단골 술집', '청담동 커피, '백년초 불고기', '핑크포차' 등 한글로 쓰인 70여 개의 네온사인 간판이 빛을 발하는 이색적인 모습이 화제가 되면서 관광 명소로 거듭난 것이다.

중국 정부의 '조선 문자 공작 조례'에 따라 중국어도 병기돼 있었지만, 중국 도시 한복판에 한글 간판 수십 개가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야경이 있다는 것 자체가 중국의 한족 젊은이들에게는 매력으로 다가온 듯했다.

한궈창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른바 ' 포토 스팟' 앞에는 사진을 찍기 위해 수십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이들 근처에는 수십 명의 전문 사진사와 메이크업(화장) 아티스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촬영용 조명 장비와 삼각대까지 구비한 이들은 사진 1장에 10위안(약 1,800원), 5장 30위안(약 5,500원), 8장 50위안(약 9,200원)을 받고 관광객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화장 비용은 별도로 받는다고 했다.

지난달 20일 중국 지린성 옌지시의 한궈창을 방문한 여성 관광객이 인력거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옌지=조영빈 특파원

'한복(韓服)'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았다. 영하 10도의 기온에 동북 지방 특유의 매서운 칼바람까지 불었지만 얇디얇은 한복 저고리·치마를 둘러 입고 나선 20대 여성들은 한궈창을 배경으로 개성 넘치는 포즈를 취하며 쉴 새 없이 휴대폰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수도 베이징에서 친구들과 함께 고속열차를 타고 여행을 왔다는 20대 류는 "요새 인터넷에서 워낙 유명해진 곳이라 꼭 와보고 싶었다. 한복도 예쁘고 화장도 잘돼서 한 시간 동안 사진만 찍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한궈창 주변에는 약 20개의 한복 대여점이 있는데, 이 중 대부분은 한궈창이 관광 명소로 자리 잡기 시작한 뒤 들어섰다고 한다. 한복 한 벌 빌리는 데 대략 50~100위안(약 9,200~1만8,000원)의 시장가가 형성돼 있었다.

중국 옌볜대 앞 골목에 있는 한 한복 대여점. 한궈창이 유명해지자 한복 대여점도 최근 크게 늘었다. 옌지=조영빈 특파원

상가 뒤편 골목 구석구석에는 붕어빵, 떡볶이, 막걸리 등 한국 음식을 파는 노점이 가득했다. 밤이 깊어 갔지만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인파 탓에 현지 교통경찰은 한궈창 진입 도로 일부를 통제해야만 했다. 인증샷을 찍고 있던 인원만 수백 명이었고, 하루 전체 방문객 수는 수천에서 수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다.


"한국 드라마 같아..." 조선족 거리 신드롬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에 '한궈창(韓國墙)'을 검색하자 수백 개의 사진이 검색됐다. 대부분 옌볜대 앞 거리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1~2년 사이 올라온 게시물들이다. 바이두 화면 캡처

2012년 완공된 한궈창은 원래 중국의 여느 대학가에 있는 대형 상가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계기는 2,000만 명의 팔로어를 보유한 '팡치(方奇)키키'라는 유명 인플루언서가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이 한창이던 2021년 이곳을 방문한 뒤 '도우인(중국판 틱톡)'에 사진과 영상을 올리면서였다. "한국 드라마 속 풍경을 담은 곳이 중국에 있다"는 소개가 덧붙여졌다.

옌볜대 앞은 '작은 서울', '한궈창'이란 별명을 얻으며 금세 유명해졌다. 아이돌 스타 웨이다쉰, 배우 궈치린, 가수 마오부이 등 중국 MZ세대를 대표하는 연예인들도 이곳을 방문해 인증샷을 올렸다. 최근에는 '워먼싼' 등 중국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도 한궈창에서 촬영됐다.

현지 매체 소후닷컴은 "옌지라고 쓰인 커피잔을 들고 한국말로 가득 찬 벽 앞에 선 모습은 마치 한국 드라마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낭만을 선사한다"며 "한궈창은 동북 지역에서 꼭 가봐야 하는 명소가 됐다"고 소개했다. 옌지TV는 "개성 넘치는 간판이 화려한 그림을 형성하며 방문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고 인기 비결을 분석했다. 조선족 대학생들의 일상적인 공간이 한족 청년 세대 사이에서 작은 신드롬을 일으킨 셈이다.

지난달 20일 중국 지린성 옌지시 옌볜대 주변 골목에서 한 상인이 떡볶이 등 한국 음식들을 팔고 있다. 옌볜대 앞을 찾는 관광객이 최근 급증하며 붕어빵, 한국식 짜장면, 막걸리 등을 판매하는 노점들이 늘었다. 옌지=조영빈 특파원

중국에서 관광지라는 인식조차 흐릿했던 옌지시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한궈창에 자리한 각종 음식점의 매출은 급상승했고 옌지 시내 민속정원, 민속박물관 방문객도 덩달아 늘었기 때문이다. 신화망에 따르면 지난해 1~8월 옌지시 방문객은 약 633만9,000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161%나 늘었다. 같은 기간 관광 수입은 약 97억9,000만 위안(1조8,000억 원)으로 무려 254% 상승했다.

한궈창이 '반짝인기'에 그치지 않도록 각종 시설도 재빠르게 업그레이드했다. 옌지시는 지난해 220만 위안(약 4억 원)을 들여 한궈창 건물에 붙은 75개 간판 조명을 신형으로 교체했고, 모든 간판 불빛을 동시에 켜고 끌 수 있는 통합 전원 시스템도 마련했다. 옌지시 주택도농개발국과 교통경찰대는 관광객들의 편의와 안전을 위해 옌볜대 앞 8차선 도로에 100여 개의 바리케이드를 설치, 인증샷 구역과 차선을 분리했다. 관광객들이 몰리는 야간에는 교통경찰을 상시 배치하고 있었다.


'한궈창'으로 한국 여행 대리만족

지난달 20일 중국 옌볜대 앞의 한궈창 거리에 놓인 기념 사진 가격 안내문. 옌지=조영빈 특파원

한궈창의 인기는 코로나19 기간 중국인들의 여행 트렌드가 바뀐 결과로도 분석된다. 올해 1월 중국인 방한객 규모는 28만 명으로,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1월(39만 명)의 71%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한국 단체관광이 여전히 금지됐던 지난해 1월 2만5,000명보다는 늘어난 숫자이지만 중국인의 한국 여행은 코로나19 이전보다 대폭 감소한 상황이다.

게다가 과거 막강한 인구 수와 소비력을 앞세운 단체 관광(유커·遊客)이 중국인 한국 여행의 주요 흐름이었다면 최근에는 삼삼오오 돌아다니며 작은 소비를 즐기는 개인 관광(싼커· 散客)이 대세다. 명동 면세점 싹쓸이 관광에서 홍대· 이태원을 거니는 감수성 여행으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더욱이 한국의 최대 관광 소비국이던 중국은 코로나19 기간 깊어진 경기 침체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국 젊은이들이 사상 최악의 취업난으로 주머니 사정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서울 도심 느낌이 충만한 한궈창 방문으로 한국 여행 욕구를 어느 정도 대체한 셈이다. 랴오닝성 선양시에서 엄마와 함께 한궈창에 놀러 왔다는 20대 여성 량은 "평소 드라마와 K팝 등 한국 문화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에 가고 싶지만, 돈도 시간도 없다"며 "이곳은 꼭 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좋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0일 중국 지린성 옌지시 옌볜대 앞을 찾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한복을 입고 사진 촬영을 기다리고 있다. 옌지=조영빈 특파원

중국의 '한한령(限韓令·한류 콘텐츠 제한령)' 이후 중국에서는 한류 콘텐츠 유통이 매우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반면 중국에서 한류 콘텐츠를 불법 유통하다 적발된 건수는 지난해 상반기에만 2만 건이 넘는다. 중국 MZ세대는 여전히 한류 문화 수요가 크다는 분석도 많다. 윤호진 한국콘텐츠진흥원 베이징비즈니스센터장은 "한국 문화에 대한 중국 젊은이들의 갈증이 한궈창 인기로 나타난 셈"이라며 "한류 문화를 여전히 수출해야 하는 한국 입장에선 긍정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고 짚었다.

옌지= 조영빈 특파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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