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기울어진 운동장 바로잡는 법
지난 30년간 이승만 연구 확대… 양적 축적이 질적 변화로
험지 바꾸는 방법도 그럴 것
이승만 대통령을 재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을 100만 넘는 관객이 볼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영화 만든 김덕영 감독은 당초 “5만명만 보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 다큐에 출연한 역사학 교수는 김 감독이 찾아와 ‘관객 5만 소망’을 얘기했을 때 차마 입으론 말 못 하고 ‘극장에 걸리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다.
우리 영화판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영화계는 물론이고 문화계 전체가 왼쪽으로 기울어 아무리 애써도 바라는 결과가 나오기 어려운 구조라고 봤다. 김 감독과 지인들이 개봉 전후 갖가지 음모론을 제기한 것도 그런 피해의식 때문이다. ‘김대중 다큐는 상영관 100곳인데, 이승만 다큐는 상영관 10곳’ ‘이승만 영화라고 포털이 포스터를 노출하지 않고 있다’ ‘포스터에서 이승만 얼굴을 일부러 가렸다’ 같은 말이 나왔다. 영화 담당 기자의 취재 결과 모두 사실이 아니거나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었다. ‘건국전쟁’ 관객은 24일 현재 116만명이다. ‘길 위에 김대중’ 관객 12만명의 거의 10배에 이른다.
운동장이 갑자기 바로잡혔기 때문인가? 애초 영화관이나 다수 관객은 운동장 기울기엔 관심 없었다. 영화관은 수익 따지고, 다수 관객은 재미와 화제성에 관심 있을 뿐이다. ‘건국전쟁’이 예상 밖으로 소문 나고 관객이 몰리자 상영관은 최다 480곳으로 늘었다. 애국 우파에 대한 동정이나 대한민국에 대한 충정 때문이 아니다. 흥행 되고 관객이 들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 주장이 완전히 허구라는 말이 아니다. 1960년 4월 이승만 하야 후 어느 정권도 이승만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하와이에서 2주 정도 머물 작정이었던 이승만은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1965년 7월 현지에서 영면했다. ‘이승만 운동장’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더 기울어졌다. 북한이 정통성 있고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 될 나라라는 인식마저 뿌리내렸다.
‘건국전쟁’ 흥행은 그러나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 아니다. 지난 30년간 지속적으로 이승만과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재평가 흐름이 축적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5년 2월 조선일보는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다. 지면에는 이승만의 삶을 65회 연재했다. 당시 연재 기사를 쓴 이한우 기자는 이번 ‘건국전쟁’에도 출연했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은 1997년 전신인 현대한국학연구소 설립 이래 규모가 방대한 이승만 전집을 발간해 왔다. 하와이 현지 연구자 이덕희씨는 오랜 연구로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을 세밀하게 복원했다.
양적으로 축적되다 보면 어느 순간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말하는 양질 전화, 공학자들이 말하는 축적의 시간,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특이점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현상이다. 이승만 연구가 양적으로 축적된 바탕에서 ‘건국전쟁’ 흥행이라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승만을 프레임에 맞춰 비난하는 일부 유튜브 콘텐츠도 힘을 잃고 있다. 팩트를 제시하며 반박하는 ‘그라운드씨’ ‘박종인의 땅의 역사’ ‘간다효’ 같은 영상이 압도적으로 늘어났다. 그간 발굴한 자료와 축적된 연구 덕분이다.
‘건국전쟁’ 흥행은 기울어진 운동장 바로잡는 법을 생각하게 한다. 보름 후 총선에서 양당 모두 이른바 험지에 출마한 후보가 느닷없이 당선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해당 지역에 지속적으로 공을 들이고 양적인 축적을 하다 보면 아무나 꽂아도 되는 운동장이 바로잡히는 질적 변화가 일어나는 날이 어느 순간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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