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기형도의 시 ‘빈집’에는 역설이 있다. 사랑을 잃었다고 시작하여, 사랑이 빈집에 갇혔다고 끝난다. 잃어버렸다는 사랑이 어딘가에 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사랑의 상실이란 대개 타력에 의한 재난처럼 여겨진다. 우리 삶에서 무엇이 사랑을 잃게 만드는가? 서로 간의 오해? 누군가의 미숙함? 어른들의 반대? 세상의 시선? 경제적 압박?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시간의 풍화? 원인이 무엇이든, 사랑의 상실은 자신이 원하던 사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피동형으로 말하게 된다. 잃어버린 사랑은 어디로 갔는가.
시의 중간 부분은 어려울 것이 없다. 시인은 자신의 연애사를 장식했던 소도구들을 나열한다. 밤, 겨울, 안개, 촛불, 백지, 눈물… 그리고 마침내 말한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즉, 사랑의 상실은 타력에 의한 재난이 아니라, 자신이 초래한 상황임을 자백한다. 결국 자기 열망이 식은 것이다. 금서가 독서를 부추기듯, 외부 억압은 사랑을 오히려 부추기는 법. 사랑의 진정한 상실은 결국 자기 열망이 사그라들었을 때 온다. 따라서 누구도 전적으로 남 탓, 세상 탓을 할 수는 없다. 사랑의 상실은 결국 자신이 책임져야 할 심리적 사태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시의 제목인 빈집의 뜻이 분명해진다. 떠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사랑이 자신을 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을 떠난 것이다. 사랑을 빈방에 두고,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유폐한 것이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그곳에 자기는 이제 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방은 빈방이 맞다. 그러나 상실한 사랑이 갇혀 있다는 점에서 그 방은 아주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 떠나고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을 때, 사물은 자신의 존재감을 보다 분명히 드러낸다. 마치 로마의 신은 떠났지만 아직 그리스도의 신은 도착하지 않았던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마음처럼. 인적 없는 도시의 밤을 즐겨 찍은 린 새빌의 사진을 두고, 평론가 제프 다이어는 사람 없는 그런 순간에야 비로소 도시가 스스로 거주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때야 비로소 도시의 건물과 벽이 인간에 의해 사용되기를 멈춘다. 사용 가치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사물은 비로소 스스로 존재하게 된다. 사물은 이제 더 이상 뭔가 견디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다.
텅 빈 공간은 방문자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당신은 여기에 왜 왔는가. 당신은 공허를 보기 위해 왔는가.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나는 아무도 아니오! 당신은 누구요?”(I’m nobody! Who are you?)라고 노래했다. 그처럼 텅 빈 공간은 방문자에게 묻는다. 나는 비어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도 나처럼 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정부 “의대 교수도 집단 사직땐 진료유지명령 검토”
- 與 하남갑 ‘尹호위무사’ 이용 승리, 추미애와 대결…이혜훈, 하태경 꺾어
- 민주당 선대위 출범, 이재명-이해찬-김부겸 ‘3톱’ 체제
- 與선대위, 한동훈 ‘원톱’에 윤재옥·나경원·원희룡·안철수 공동위원장 체제
- 반미 단체 출신 전지예, 野 비례 후보 자진 사퇴
- 전세사기 피해 1년, 끝나지 않는 고통
- 아무런 전조 증상 없이 갑작스럽게 빙빙~ 도는 것 같아
- 尹, 종교지도자들 만나 “민생-의료개혁에 힘 모아달라”
- MB “광우병은 날 흔들려던 것…못하니 다음 대통령 끌어내려”
- 조국 “22대 국회서 ‘한동훈 특검법’ 발의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