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24. 3. 24.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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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빈 공간을 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기형도 ‘빈집’)

기형도의 시 ‘빈집’에는 역설이 있다. 사랑을 잃었다고 시작하여, 사랑이 빈집에 갇혔다고 끝난다. 잃어버렸다는 사랑이 어딘가에 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사랑의 상실이란 대개 타력에 의한 재난처럼 여겨진다. 우리 삶에서 무엇이 사랑을 잃게 만드는가? 서로 간의 오해? 누군가의 미숙함? 어른들의 반대? 세상의 시선? 경제적 압박?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시간의 풍화? 원인이 무엇이든, 사랑의 상실은 자신이 원하던 사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피동형으로 말하게 된다. 잃어버린 사랑은 어디로 갔는가.

시의 중간 부분은 어려울 것이 없다. 시인은 자신의 연애사를 장식했던 소도구들을 나열한다. 밤, 겨울, 안개, 촛불, 백지, 눈물… 그리고 마침내 말한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즉, 사랑의 상실은 타력에 의한 재난이 아니라, 자신이 초래한 상황임을 자백한다. 결국 자기 열망이 식은 것이다. 금서가 독서를 부추기듯, 외부 억압은 사랑을 오히려 부추기는 법. 사랑의 진정한 상실은 결국 자기 열망이 사그라들었을 때 온다. 따라서 누구도 전적으로 남 탓, 세상 탓을 할 수는 없다. 사랑의 상실은 결국 자신이 책임져야 할 심리적 사태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시의 제목인 빈집의 뜻이 분명해진다. 떠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사랑이 자신을 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을 떠난 것이다. 사랑을 빈방에 두고,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유폐한 것이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그곳에 자기는 이제 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방은 빈방이 맞다. 그러나 상실한 사랑이 갇혀 있다는 점에서 그 방은 아주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 사진가 스기모토 히로시의 텅 빈 극장 이미지. 우리는 한때 그곳을 가득 메웠을 관객과 앞으로 올지 모르는 관객을 상상한다. 사진 출처 위키아트
기형도의 시를 염두에 두면, 왜 예술가들이 빈 공간에 탐닉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빈 공간에는 아무도 없지만, 무엇인가 있다. 어떤 결여와 상실로 인해 발생한 기이한 에너지가 축적되어 있다. 그 에너지로 인해, 빈 공간에 도착한 사람은 과거에 누군가 있었고 미래에 누군가 도착할 것임을 상상할 수 있다. 이를테면 사진가 스기모토 히로시의 텅 빈 극장 이미지를 보라. 우리는 한때 그곳을 가득 메웠을 관객과 앞으로 올지 모르는 관객을 상상한다. 프랑스의 사진가 외젠 아제의 텅 빈 거리 사진을 보라. 발터 베냐민은 그 거리 사진을 미래의 세입자를 기다리는 하숙집에 비유했다.

모두 떠나고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을 때, 사물은 자신의 존재감을 보다 분명히 드러낸다. 마치 로마의 신은 떠났지만 아직 그리스도의 신은 도착하지 않았던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마음처럼. 인적 없는 도시의 밤을 즐겨 찍은 린 새빌의 사진을 두고, 평론가 제프 다이어는 사람 없는 그런 순간에야 비로소 도시가 스스로 거주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때야 비로소 도시의 건물과 벽이 인간에 의해 사용되기를 멈춘다. 사용 가치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사물은 비로소 스스로 존재하게 된다. 사물은 이제 더 이상 뭔가 견디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다.

이탈리아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살았던 거실을 촬영한 피에르조르조 브란치의 사진. 파솔리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가 살았던 분위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고 브란치는 회고했다. 사진 출처 inbloom.com
아무도 없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빈 도시에 건물이 있듯이 빈방에는 가구가 있다. 그 방에 있었던 사람을 기억하거나 앞으로 올 사람들을 기다리는 가구와 커튼과 얼룩이 있다. 이탈리아의 사진가 피에르조르조 브란치는 1995년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살았던 거실 사진을 찍었다. 그때는 이미 파솔리니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파솔리니와 그의 가족이 살았던 분위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고 브란치는 회고했다. 남겨진 소파는 여전히 위엄을 간직하고 있었고, 일렁이는 커튼과 빛은 그 거실이 완전히 비어 있지 않음을 나타냈다고.
프랑스 사진가 모리스 타바르의 ‘눈이 있는 방’. 사진 속 벽에 눈을 삽입했다. 아무도 없을 때 벽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사진 출처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정말로 텅 빈 방이라면? 그래도 거기에는 벽이 있지 않은가. 아무도 없을 때 벽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그래서일까. 초현실주의 운동의 일원이었던 프랑스의 사진가 모리스 타바르는 1930년에 찍은 ‘눈이 있는 방’이라는 작품에서 아예 벽에 눈을 삽입했다. 공간을 구성하기 위해서 벽이 필요하다면, 텅 빈 공간이란 원래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텅 빈 방에는 다름 아닌 벽이 살고 있으므로.

텅 빈 공간은 방문자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당신은 여기에 왜 왔는가. 당신은 공허를 보기 위해 왔는가.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나는 아무도 아니오! 당신은 누구요?”(I’m nobody! Who are you?)라고 노래했다. 그처럼 텅 빈 공간은 방문자에게 묻는다. 나는 비어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도 나처럼 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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