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비뚤어진 애국심

이우중 2024. 3. 24. 23:1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中 대표 기업도, 노벨상 작가도
매국노로 매도되는 건 한순간
SNS 매개로 한 애국주의 광풍
국가 전체로 봐선 해악만 끼칠 뿐

중국 ‘국민 생수’로 불리는 농푸산취안(農夫山泉)의 창업자로, 최근 3년간 중국 최고 부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산산(鐘睒睒) 회장이 갑자기 매국노로 몰렸다.

농푸산취안이 판매하는 생수병의 빨간색 뚜껑이 일장기를 상징하는 데다 포장지에 그려진 산이 일본 후지산이라는 ‘친일기업설’이 돌았고, 중 회장의 아들이 미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나오며 불매운동으로 이어졌다. “농푸산취안 제품을 사면 미국인에게 이득이 된다”는 등의 이유에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농푸산취안 제품을 변기나 바닥에 쏟아 버리거나 개봉하지 않은 생수병을 버리는 영상이 줄을 이었다. 한 편의점은 농푸산취안 생수를 판매하지 않겠다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이우중 베이징 특파원
이런 논란은 지난달 25일 음료기업 와하하(娃哈哈)의 쭝칭허우(宗慶後) 회장 사망을 계기로 불붙었다. 중 회장이 쭝 회장의 도움을 받은 뒤 그를 배신했다는 소문이 확산한 것이다. 이에 ‘은둔의 사업가’로 불릴 만큼 외부 노출을 최소화하던 중 회장이 이례적으로 직접 해명 글을 올려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논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중국 포털사이트에는 “농푸산취안의 성공 뒤에는 일본 금융이 있었다”는 내용의 글도 올라왔다. 농푸산취안이 재해 현장에 생수 2만4000병을 기부한 것을 두고는 “중국 최고 부자의 기업이 고작 2만4000병만 기부했다”고 비꼬며 “반면 미국 하버드대에는 1억위안, 일본 지진에는 5000만위안을 각각 기부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에 농푸산취안은 23일 입장문을 내고 “제기된 의혹은 사실과 다르다”며 해명에 진땀을 흘리는 등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보다 앞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중국 작가 모옌(莫言)이 친일파로 몰려 법원에 고발당하기도 했다. 그를 고발한 사람은 중국 SNS 웨이보에서 팔로어 20만명 이상을 보유한 이용자 ‘진실을 말하는 마오싱훠(毛星火)’라는 인물로, 모옌이 그의 작품에서 일본의 중국 침략을 미화하고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을 모욕했다고 주장했다. 모옌의 작품을 문학이나 예술이 아니라 영웅열사보호법 위반과 반민족행위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소장이 접수되자 그의 웨이보에는 ‘애국자’들이 일제히 몰려들어 공감을 표했다.

억지 주장이 이어지면서 중국의 대표적인 국수주의 논객 후시진(胡錫進) 전 환구시보 편집인까지 보다 못해 이들을 비판했다. 후 전 편집인은 이런 논란에 대해 “트래픽을 위한 소동”이라며 “모옌 기소는 당이 영도하는 헌법질서하의 관용과 자유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밝혔다. 그러자 마오싱훠는 후 전 편집인도 고소하겠다고 나섰다.

이런 일들은 모두 ‘애국’을 앞세워 자행되지만 진짜 애국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애국이라면 건전한 비판 역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일 테고, 다른 이를 매국노로 매도한다고 자신이 애국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이는 이득이 되는 일부에게 이용되거나 집단 광기일 뿐, 국가 전체를 놓고 봐도 해악을 끼친다.

사실 이런 분위기는 중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비뚤어진 애국심이 종종 눈에 띈다. 몇 년 전 일본 불매운동 때 일제 차량에 해코지를 한다거나, ‘단속반’을 자처하며 유니클로의 한국 매장에 순찰을 돌며 손님이 들어가는지 감시한다든지 하는 사례가 있었다. 최근에는 무심코 한 말이었겠으나 상점의 일본어를 보고 ‘매국노’라고 표현해 논란이 됐고, 선거철이 되면서 상대 진영 지지자를 매국노로 매도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다만 중국이 ‘애국주의 교육법’ 시행에 돌입하고, 중화민족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내용의 교과서가 대학 필수교재로 채택되는 등 최근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다른 나라의 사례에 비춰봐도 매우 우려스럽다. 어떤 주의나 사상이든 한 번 광풍이 불면 희생자를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50∼60년 전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우려와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는 중국인들이 국가의 묵인 또는 은근한 장려에 힘입어 비이성적 애국주의를 일종의 도피처로 삼을 수 있겠다는 걱정이 기우이기를 바란다.

이우중 베이징 특파원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