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아 에 이 오 우
기자 2024. 3. 24. 20:05
외할머니는 설거지를 하고 미친 너는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먹다 말고 여전히 미쳐서 설탕 단지를 마루로 내던졌다
마루에 찐득거리는 별가루처럼 쏟아진 흰 설탕
그때 부엌에서 들려오는 이상하고 조그마한 소리
미친 너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외할머니가 느닷없이 죽은 것을 알았다
이상하게도 알았다 그 순간 네게서 ‘미친’이 떨어진 것도 알았다
새끼 노루의 까만 똥처럼 ‘미친’이 뭉쳐져 굴러가는 것을 보았다
외할머니를 설탕가루들 위에 옮겨 눕혔다
119에 전화를 걸다 말고 바라본 마루 위의 네 발가락 자국
눈 내린 것처럼 쌓인 하얀 설탕 위 네다섯 개의 발가락 동그라미들
눈 위에서 총 맞아 죽은 외할머니 노루와
그 주위를 맴도는 새끼 노루 한 마리를 둘러싼
발가락 자국들, 아 에 이 오 우 다섯 모음으로 발음되는
김혜순(1955~)
너는 외딴집에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너는 미친 아이. 너는 “설탕 단지를 마루로 내던졌다.” 하얀 설탕가루가 마루 위에 보자기처럼 펼쳐지고,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때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외할머니가 죽었다. 너는 “외할머니를 설탕가루 위에 옮겨 눕”히고, “119에 전화를 걸다”가 마루 쪽을 보았다. 그 순간 현실 세계는 사라져 버리고 눈앞에 펼쳐진 환각의 세계. 눈처럼 하얀 설탕 위에 “총 맞아 죽은” 노루가 누워 있다. 그 곁에 “새끼 노루 한 마리”가 찍어놓은 모음 같은 발자국들.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어서 ‘미친’ 날들. 너와 외할머니는 노루가 되었을까.
이 시가 수록된 시집은 <죽음의 자서전>이다. 어느 해 시인은, 온몸이 전기에 감전된 듯한 고통 속에서 49편의 시를 썼다고 한다. ‘49’는 ‘49재'의 기록을 의미한다. 이 시의 부제는 ‘스무이레’로, 미친 아이와 그 아이 곁을 떠나가는 외할머니의 영혼을 위한 비가(悲歌)이다.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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