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공익변호사로 살며 ‘인권은 끝이 없는 길’ 절감”

강성만 기자 2024. 3. 24.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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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20년 맞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황필규 변호사

황필규 변호사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한국의 첫 비영리 공익변호사단체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이하 공감)이 법의 날인 4월25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창립 20주년 기념행사를 한다.

“차별과 혐오에 맞선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 곁에서 법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공익변호사 단체.” 공감이 홈페이지에 내건 자기 규정이다.

공감은 2004년 1월 아름다운재단 산하 공익변호사그룹으로 첫발을 뗐다. 사법연수원 33기 동기인 염형국, 소라미, 김영수, 정정훈 네 변호사가 창립을 이끌었다. 8년 뒤에는 아름다운재단에서 독립해 비영리재단법인의 틀을 갖췄다. 현재 소속 변호사는 9명으로 공익소송과 제도개선, 공익법 교육 등의 활동을 주로 하며 재원은 오롯이 기부금이다. 1년 예산은 10억원 정도이며 이 가운데 70%는 2천명 정도가 내는 정기기부이며 나머지는 단체나 일시적인 기부란다.

“초기에는 공감 구성원의 지인이나 법조계 분들이 주로 후원하다 차츰 공감 활동이 알려지면서 지금은 후원자 면면이 굉장히 다양합니다. 후원자들이 계속 늘다 한동안 정체 상태인데요. 이번 20년 행사를 통해 더 늘었으면 하는 마음이 큽니다.”

사법연수원(34기)을 수료한 2005년 공감에 합류해 올해로 20년째 공익변호 외길을 걷는 황필규(56) 변호사의 바람이다.

공감 15주년 기념행사. 황필규 변호사 제공

공감은 출범 이후 차별과 혐오와 맞서 조금씩 세상을 바꿔왔다. 황 변호사가 2006년부터 난민지원단체들과 연대해 법 제정 논의를 이끌고 정치권을 압박한 끝에 2011년 국회를 통과한 난민법이 대표적이다. 2006년 미얀마민주활동가 9인의 난민불인정결정 취소소송에서 승소한 그는 난민과 난민 신청자의 인권 신장을 위해선 독립적인 난민법이 필요하다고 보고 시민단체들과 함께 법 제정을 위한 기초연구와 실태조사에 나섰고 시민 300여명이 참여한 플래시몹 행사까지 기획했다. 이런 노력은 결국 법 제정 결실로 이어졌다. 2008년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이나 국외입양 때 가정법원 허가를 받도록 한 2012년 입양특례법 전면개정안 국회 통과도 시민단체와 공감 변호사 등의 협업이 결실로 이어졌다.

지난 21일 서울 안국역 근처 사무실에서 만난 황 변호사는 “공감 활동의 큰 축은 네트워킹”이라고 했다. “공감은 현재 취약 노동, 여성 인권, 장애 인권, 빈곤과 복지, 성소수자 인권, 재난과 인권 분야로 나눠 활동하고 있는데요. 각각의 사안에 대해 관련 단체들과의 네트워킹을 통해 제도 개선책을 찾고 있습니다. 3년 전에 공감도 참여한 연대 단체에서 ‘외국인 구금시설 내 새우꺾기 고문’을 문제 제기해 법무부가 인정하고 개선안을 마련하겠다는 발표도 했죠.”

네트워크 활동 다음으로 비중이 큰 것은 공감이 자체 발굴해 인권 침해 개선 노력을 하는 방식이란다. ‘대구 이슬람 사원 건축 갈등’이 한 예이다. “한겨레 기사를 보고 대구 구청과 주민들이 사원 건축을 막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주민 인권과 관련해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사안을 공감이 주도해 국가인권위에 진정했고 변협에도 건의해 실태조사에 나서도록 했죠.”

홈페이지로 접수되는 소송 지원 신청이 의미 있는 공익 변호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실 신청 내용은 대부분 우리가 다루기 어려운 사건들입니다. 하지만 의미 있는 사건도 있어요. 국정원 여직원 정년 차별 문제나 탈북자가 국정원 옛 합동신문센터에서 조사를 받다 맹장이 파열되었다는 내용들이 그렇죠. 국정원 조사 방식의 문제는 실제 공익 소송까지 이어졌어요.”

지난 20년 공감 공익변호 분야의 변화를 궁금해하자 그는 “재난이 들어간 게 큰 변화 중 하나”라고 답했다. “세월호 이후에도 재난이 우리가 다룰 분야인지를 두고 내부적으로 논란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태원 참사가 벌어지고 공감 변호사 중에서도 재난 문제에 열정을 가진 분이 있어 별도 팀까지 꾸렸죠.”

그는 앞으로 추가가 예상되는 활동 분야로 기후 위기를 꼽았다. “기후위기는 폭염 등 이상기후를 불러와 컨테이너나 비닐하우스에 사는 주거 취약 집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어요. 사회적 약자에 초점을 맞추는 우리 활동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봐야죠. 이런 문제 의식에 최근 1년 넘게 기후위기 소송 전문 변호사들과 공감 구성원들이 함께 공부 모임을 해오고 있습니다.”

‘공익 변호사 단체의 맏형’ 격인 공감 출범 이후 어필이나 희망법, 동행, 이주민친구와 같은 비슷한 성격의 단체들이 속속 등장했고, 태평양이나 지평 등 로펌도 별도 법인을 만들어 공익 변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평이 만든 두루는 공익 변호사가 10명이 넘는다. “새로 생긴 공익 변호사 단체들이 우리와 활동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아 국외입양 등 여러 사안에서 협업하고 있습니다.”

국내 첫 비영리 공익변호사단체 공익소송과 제도개선, 교육 주력
기부금으로만 운영…2천명 정기후원


난민법, 입양법 등 법제화 이끌며
차별과 혐오 맞서 조금씩 세상 바꿔
“법제 개선에도 의식은 못 따라가
국민정서 뒤에 숨는 정부 탓 커요”


‘법률신문’은 지난해 말 한국의 공익변호사는 변호사 중 0.33%(177명)로, 미국의 1.15%(1만5천명)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고 보도했다. 이런 차이가 왜 생기는지 궁금해하자 황 변호사는 “문화의 차이인 것 같다”며 덧붙였다. “미국은 68혁명 영향으로 1970년대에 로스쿨에 간 학생들이 대거 공익변호 활동에 뛰어들었고 포드재단과 같은 단체가 전폭적으로 재정 지원을 했어요. 미국 기업들은 큰틀에서 지원하되 공익변호 내용에 대해선 예민하게 따지지 않아요. 반면 우리는 후원 기업이나 로펌들이 자기들 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익 변호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성소수자 문제가 대표적이죠. 장애인 문제만 하더라도 불과 10년 전에는 그 내용을 따지는 경우가 없었는데 요즘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관련이 있는지 묻기도 합니다.

그가 공익 변호로 세상을 바꾸려고 나선 지 20년이다. 세상은 바뀌었을까? “법제는 개선이 있었지만 국민 인식은 오히려 후퇴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인식 문제는 법을 고친다고 답을 찾기 힘들고 다양한 분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할 것 같습니다. ‘인권의 길은 끝이 없다’는 게 평소 제 지론인데요.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는 “국민들이 난민을 처음에는 불쌍한 사람으로 대하다 갈수록 살인범이나 내가 먹고살 것을 빼앗는 존재로 인식하는 데는 정부 역할이 크다”는 생각이다. “법무부가 낸 2차 외국인정책기본계획(2013~2017)을 보면 정부가 오히려 인종주의를 퍼뜨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국민 사이에 반다문화주의가 있으니 외국인 의무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요. 정부가 난민에 대한 국민 정서를 비겁하게 받아들인 거죠. 문재인 정부 때 나온 3차 계획(2018~2022) 역시 온갖 신문에 나온 외국인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와 심지어는 태극기 집회 참여자의 반외국인 발언까지 모아놓았더군요.”

황필규 변호사. 강성만 선임기자

2010년 난민 주제로 모교인 서울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은 황 변호사는 자신이 공익 변호의 길을 걷는 데는 13살부터 3년 동안 홍콩의 국제학교에 다닌 게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어요. 수십 개 나라에서 온 피부색이 다양한 학생들과 학교에 다니며 나라나 피부색을 따지지 않고 친구를 사귀었어요. 성소수자 역사 선생님도 계셨고요. 자유로운 공기를 느꼈죠.”

그는 세월호 참사 뒤 거의 1년을 안산으로 출근하며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 곁을 지켰다. “가족들 집사 역할을 했죠. 가족들이 정부와 협상하면 조언해주고 가족들끼리 싸우면 말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당시 한 유족이 페이스북에 쓴 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한 유족이 제가 어떤 때는 뒷목을 잡고 쓰러질 정도로 가족들보다 더 분노하면서도 어떤 때는 어찌 저럴까 할 정도로 가족들에게 냉랭했다고 썼더군요. 그 글을 보고 마음속으론 기뻤어요. 제 생각을 정확히 읽은 글이었거든요. 유족들은 원하지만 그럴 경우 그 분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어 제가 강하게 반대한 일들이 있었죠.”

인터뷰를 마치며 ‘공감의 계획’을 묻자 그는 개인 의견이라며 이렇게 답했다. “지난 20년 활동하며 구축한 시스템이나 축적한 기록을 잘 정리해 공감 구성원들은 물론 외부와도 공유하고 싶어요.” 그는 왜 공감을 떠나지 않느냐는 물음에는 “하고 싶은 일이니까요. 사회적으로 유해하지 않고 조금은 유익하다는 생각도 들어서”라고 받았다.

(후원문의:(02)3675-7740, https://www.kpil.org/give/)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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