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개혁’ 본질 왜곡하는 정부 [기고]

한겨레 2024. 3. 2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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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의과대학 정원 2천명 확대 발표 뒤에도 의사와 의대생들의 집단행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화상회의로 열린 의대 운영 대학 총장 간담회에서 교육 여건 마련을 위한 대학의 준비와 정부의 지원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지관 | 대학문제연구소장·덕성여대 명예교수

대학별 의대 정원 배정 발표에 따라 의대 교수들까지 집단 행동에 나서기로 하면서 정부와 의료계 대립이 극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런 양상은 마치 충돌 직전의 두 폭주기관차처럼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의료체계가 마비될 수 있다는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킨다. 의대 정원 확대는 전 정부에서부터 시도되어온 묵은 숙제이고, 의료개혁에 대한 필요성도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그런데도 왜 사태가 이 지경에 다다른 것일까?

정부는 의사집단의 이기주의와 무책임을 탓하고, 의료계는 정부의 정치적 목적에 따른 강압적인 시행을 비판한다. 실제로 의사집단의 기득권 구조가 의대 증원 문제를 비롯한 의료개혁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거니와, 증원 규모를 못박고 뭔가 보여주겠다는 식으로 밀어붙인 정부 태도에서도 총선을 겨냥한 ‘정치적’ 의도가 엿보인다. 이런 양비론과 2천명 증원을 둘러싼 극한 대립이 부각되면서 정작 더 본질적인 문제는 묻히고 있다. 하나는 의료체계의 공공성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국민적·사회적 요구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 구조조정의 교육적·공공적 성격에 대한 고려다. 필수의료 부문의 태부족과 수도권과 지방의 의료서비스 불균형이 이윤 추구 중심의 시장주의 풍토에서 기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학 구조조정 역시 경쟁적 시장주의가 지배함으로써 교육 불평등을 더 악화시켜왔다.

의대 정원 확대는 보건의료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대학 구조조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학 구조조정에는 학령인구 감소로 축소 중인 대학 전체의 규모와 전공별 적정 인원에 대한 고려, 대학 내의 교육 여건에 대한 객관적 판단과 해당 분야 전문가들과의 협의 등의 절차가 수반된다. 정부의 2천명 증원은 그동안의 논의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정부는 총선을 목전에 두고, 정원 확대 규모부터 대학별 배분까지를 불과 한달 반 사이에 군사작전하듯 밀어붙였다. 그 기간 내내 2천명이라는 숫자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는 대통령의 목소리만 크게 울릴 뿐, 교육의 관점에서 대학 정원 조정의 책임을 진 교육부 장관은 존재감을 찾아볼 수 없다. 의대 증원 추진이 한편에서 ‘총선용’ 급조 정책이라는 혐의를 받는 이유다.

교육 차원에서, 의대 정원의 급작스러운 대폭 증원이 불러올 부작용은 심각하게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망국병이라고 일컬어지는 한국 대학의 ‘일류대 중심’ 입시 풍토에서 현재 수도권과 비수도권을 막론하고 의대는 실질적인 서열 상위를 점하고 있다. 향후 대학입시에서 최상위권 학생들의 의대 쏠림 현상이 확대·심화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는 구조조정 중인 대학 전반의 운영에 부정적 여파를 미치겠거니와 좀 더 직접적으로는 자연과학 계통의 전문교육에서 인적 자원의 심각한 결핍을 초래할 것이 예상된다. 최근 교육부는 타 전공의 정원 축소를 통한 첨단 분야 학과의 신설이나 증원을 대학에 요구했는데, 의대 증원이 대폭 이뤄지면 입시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곳은 이 신설학과들이다.

미래 사회에 필요한 의료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의대 정원을 늘리자는 취지 자체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증원 계획은 현재의 불균형한 의료체계에 대한 공공적 개입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면서, 대학의 교육 여건에 대한 고려와 해당 분야 교수 및 연구자들과의 협의를 통해 세우는 것이 옳다. 당장 2천명을 증원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밀고 나가는 독단적인 정책 시행은 의료개혁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정부는 의료계의 반발이나 주장을 묵살하다시피 하면서 대학별 정원 배정을 완료함으로써 의대 대폭 증원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확대한 정원을 올해 입시부터 곧바로 적용하겠다는 강경한 의지의 표현이겠으나, 그것이 과연 장기적인 의료개혁을 위한 유일한, 아니 적어도 유효한 길인지조차 매우 의심스럽다.

정부가 대학별 정원 배정을 강행했지만 2025년도 대입전형 요강 확정 시한인 5월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폭주하는 정부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의료계의 충돌은 의료대란이라는 국가적 재난을 초래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이 치킨게임을 멈추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정부와 의료계는 증원 규모 재조정까지 포함한 전제 없는 대화를 시작해야 하고, 우리 사회는 이 위기를 올바른 의료개혁을 위한 계기로 전환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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