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한 상자에 담겨있던 것들 [서울 말고]

한겨레 2024. 3. 2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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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으로 잠들지 못한 새벽, 네 시쯤이었다.

아직 캄캄한 복도에 나는 잠시 망연자실 서 있었다.

그런데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택배 상자였다.

분초 단위로 시간을 쪼개서 움직이는 배송기사 입장에서는 프레시 백 수거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기사도 본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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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서울동남권물류단지에서 택배사 관계자가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명인(命人) | 인권교육연구소 ‘너머’ 대표

불면으로 잠들지 못한 새벽, 네 시쯤이었다. 문밖에서 툭,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친구가 뭘 보냈다고 하긴 했는데, 이 시간에 택배가?’ 아직 동도 트기 전이었다. 나가보니 역시 택배다. 아직 캄캄한 복도에 나는 잠시 망연자실 서 있었다. 갑자기 부릉~, 자동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저 트럭엔 어떤 물건들이 실려있을까? 저 트럭을 운전하고 이 새벽에 우리집 앞에 다녀간 저이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뒷모습조차 보지 못한 그가 점점 궁금해졌다. ‘저이는 대체 몇 시에 일어나서 몇 시쯤 집을 나선 걸까? 저이가 우리 집에 오기까지는 몇 번의 교차로와 몇 번의 신호등을 거쳤을까? 저이는 하루에 몇 건의 배송을 하고 있을까? 이 시간에 일하는 저이의 퇴근 시간은 몇 시일까? 저이는 어쩌면 누군가의 아빠일까? 요즘은 배송기사 중에 여성도 있다는데 혹시 여성일까?’

그런데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택배 상자였다. ‘아, 이게 프레시 백인가 보구나.’ 그제야 내가 지금 도시에서 지내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요즘 나는 일 때문에 광주에서 지낼 때가 많은데, 내가 사는 고흥은 새벽 배송도 프레시 배송도 제외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 보랭 가방은 재사용이 가능해서 하루 평균 31만 개의 스티로폼 상자를 대체했다는 광고를 본 적이 있다. 이 친환경 가방인지 상자인지를 수거해 가지 않아서 골치를 앓는 소비자들이 많다는 기사를 본 것도 같다. 분초 단위로 시간을 쪼개서 움직이는 배송기사 입장에서는 프레시 백 수거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기사도 본 기억이 난다. 배송 상품들을 한꺼번에 카트에 담아서 이동하는 배송기사들은 부피가 큰 프레시 백까지 수거하려면 시간도 지연되고 매우 번거롭다는데, 프레시 백 수거엔 수당조차 없다는 게 의아했던 기억.

보랭 가방을 열었다. 나는 보랭 가방 하나에서 나온 물품 포장을 뜯었을 뿐인데 포장재와 완충재들만으로 분리수거를 위한 재활용 상자가 가득 찼다. ‘이걸 친환경 배송이라고 광고한다고?’

마지막 포장들을 뜯었다. 토마토 한 상자, 견과류 모음, 비타민D 영양제, 그리고 편하게 차를 우려낼 수 있는 다기까지 나왔다. 부인과 문제로 조만간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는 내 소식을 들은 친구가 보낸 것들이었다. 내 건강 상태와 관련된 정보들을 검색하고 있었을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건강에 좋다는 음식 정보를 찾아내고, 바쁜 와중에 조리해서 먹지 않아도 될 음식들을 고르고, 그런 걸 사서 보내기 위해 지갑을 열고. 이 일을 위해 그녀는 대체 몇 번이나 클릭을 했을까? 이제는 제발 커피 좀 끊으라며 잔소리를 해대더니 다기까지 보냈으니 이제 커피 대신 차 마시는 습관을 들여야겠네.

나는 선물들을 하나씩 천천히 정리하며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사위가 밝아져 왔다. 자고 일어나 허겁지겁 외출 준비를 하고, 또 허겁지겁 나가다가 택배를 보았다면 이런 생각들을 하지는 못했겠지. 택배 상자는 열어보지도 못하고 현관에 던져놓고 나가기 바빴을 테지. 단지 무슨 상품이 들어있을까만 궁금해하면서.

루카치를 비롯한 여러 사상가들은 이런 현상을 ‘물화’(物化)라고 했다. 물화란 사물, 자연, 인간조차 모든 것이 상품화된 사회에서 그 안에 들어있는 총체적인 사회적 차원이 은폐되는 것을 뜻한다. ‘먹고사니즘’과 시간에 쫓기며 사는 동안 내가 단지 상품으로만 소비해 온 이 모든 삶의 관계들. 이런 세상에서는 저마다 고유한 사람도 대체 가능한 상품일 뿐이다. 하지만 오늘 내가 받은 택배에서 본 것은 단지 상품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삶과 노동, 온갖 노동문제와 환경문제. 그리고 내 친구의 절절한 우정. 나는 생각했다. 온통 물화된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상품이 아니라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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