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덮개가 씌워진 도시의 밤 [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한겨레 2024. 3. 24.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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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협, ‘Seoul City’, 2023, 캔버스 위에 아크릴물감, 200.6×495.3㎝, ©Yoon Hyup. 롯데뮤지엄 제공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미화된 장소가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옥탑방이다.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 ‘닥터슬럼프’에서도 돈 잃고 빚더미에 허덕이게 된 주인공의 주거지로 옥탑방이 등장했다. 학창 시절부터 직장 생활까지 악착같은 노력으로 우등생의 길을 밟아온 여주인공과 남들이 보기엔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라’ 재능까지 겸비한 남주인공이 각각 위기의 상황을 맞게 되어 펼쳐지는 이야기다.

‘곱게 자라’에 인용부호를 붙인 이유를 잠시 짚고 넘어가자면, 좋아하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자기만 온갖 험한 일 다 겪으며 살았고 남들은 곱게 자랐다는 편견으로 가득하다. 치열하지 않은 삶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책상에 앉아 생계 걱정 없이 공부만 했다 할지라도, 그 삶의 결이 마냥 고울 수만은 없으리라. 아무튼, 잘 나가던 인생에서 굵직한 좌절을 경험한 두 사람은 혼자서 견뎌오던 상처의 아픔과 짐의 무게를 허심탄회하게 내려놓고 서로 의지하며 회복해 간다. 이 시나리오에서 옥탑방은 두 주인공을 이어주고 위로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옥탑방의 최대 장점은 하늘이 열린 옥상을 자신만의 정원으로 갖는 점이다. ‘닥터슬럼프’에서는 집주인이 옥상 한구석에서 상추와 고추도 키우고, 양배추 씨앗도 심어놓는다. 직접 재배한 채소를 따서 옥상 평상에 걸터앉아 삼겹살에 소주도 한잔씩 걸치는 소소한 낙도 있다. 세탁기는 없지만 발로 밟아 비틀어 짠 이불보를 빨랫줄에 탁탁 털어 널어놓는 장면도 옥탑방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빠지지 않는다. 세제와 섬유유연제 냄새가 섞인 개운한 향기가 솔솔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콧등을 간지럽히는 상상을 유도한다. 옥탑방 생활이 실제로 얼마나 거칠고 춥고 불편할지 뻔히 알면서도, 잠시 부럽고 괜찮아 보였다.

옥탑방은 주로 계단 많은 달동네에 위치하고 방도 허름하지만, 문을 열면 눈앞에 시원하게 도시의 전망이 펼쳐지는 게 또 하나의 장점이다. 이런저런 고민으로 잠이 오지 않는 우리의 주인공들은 옥상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며 시름을 달래거나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곤 한다. 밤이 되어 주변이 칠흑처럼 깜깜해지고 하늘의 별빛만 쏟아질 듯 도드라지는 외딴 시골 마을은 그야말로 별천지겠지만, 인공 불빛만 가득한 대도시도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른 매력이 있다. 혼자라서 편하면서도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기분이 들게 하고, 잠 못 들어 피곤하면서도 잠들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안을 느끼게 한다고 할까.

옥탑방이 필요한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전시가 있다. 서울 잠실의 롯데뮤지엄에서 진행되는 ‘윤협, 녹턴시티’이다. 도시의 야경을 대형 파노라마 화폭에 담아놓은 윤협(1982년생)의 그림을 보면 실내에 있다는 생각을 잠시 잊을 수 있다. ‘서울 시티’는 높은 곳에서 바라본 도시의 밤 인상인데,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수백 개의 획과 점들이 색색의 빛을 낸다. 뻥 뚫린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은 평소에 우리가 알고 있는 복잡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의 면모가 아니다. 마치 대기권에서 보는 지구처럼, 서울은 적막 속에 평화롭게 빛난다.

스물여덟이라는 무엇을 시작하기에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은 어정쩡한 나이에 윤협은 서울 생활을 접고 뉴욕으로 모험의 길을 떠났다. 미술가로서 어떻게 살아볼지 본격적으로 방법을 모색한 것도 그곳에서다. 첫 뉴욕행 비행기에서 그는 미래가 불확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륙의 순간 날아오른다는 해방감에 설렜다고 한다. 실제로 뉴욕은 어느 날 그에게 선물처럼 그림 그릴 기회를 줬으며, 기회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정말로 그의 이름이 날아오르도록 해줬다. 그는 이제 뉴욕에 살고 있다. 2023년에 서울에 들러 서울 야경을 그리면서 어떤 감회에 젖었을까.

도시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냐고 물어보면, 윤협은 도시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눈을 뜨는 자신에게 도시는 일상이고 주변 환경일 뿐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도시는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얼굴을 지닌 존재라고 덧붙인다. 도시에 대한 경험이 저마다 다르기에 이것만이 도시의 진면모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고, 바라보는 사람이 무엇에 관심을 두는가에 따라 도시는 전혀 색다른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옥탑방이 치열한 현실을 감추고 낭만적이고 여유로운 환상을 주는 것처럼, 도시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언제나 도시의 실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덧씌워진 자기만의 환상을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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