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강한 D램 쇠퇴… 일본 반도체 리부팅 열기 뜨겁다”

도쿄=허문명 기자 2024. 3. 23.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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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 TSMC산학협력센터장 구로다 다다히로

● 반도체 미세화 한계, 日 40여 기업 차세대 칩 개발 중
● 반도체 전용 칩 소량생산 시대, 컴퓨터 자동설계 필수
● 네트워킹으로 개발하고, 사람들 풍요롭게 써야
● 변화된 환경이 부활 일으켜, 일본은 지금부터 시작

‘반도체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구로다 다다히로 도쿄대 교수는 “반도체 기술전쟁이 첨단으로 갈수록 한일 기업 간, 나라 간 교류와 협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도쿄=허문명 기자]
2월 24일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수탁생산)업체 대만 TSMC가 일본 구마모토현 기쿠요마치에서 '구마모토 제1공장' 개소식을 했다.

TSMC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가동하는 이 공장은 일본 반도체산업이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라는 점에서 세계 산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실제로 행사장에서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일본 반도체 제조의 르네상스가 시작됐다고 믿는다"며 "일본과 세계의 반도체 공급망을 한층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도 영상 메시지를 통해 "TSMC의 세계 전략 속에서 일본이 중요한 거점으로 확실히 자리 잡은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구마모토 1공장은 클린룸만 4만5000㎡ 크기로, 일본 프로야구 경기장인 도쿄돔 면적에 육박한다. 2027년 말 가동을 목표로 인근에 제2공장도 건설할 계획이다. 1, 2공장이 모두 가동되면 구마모토는 범용 제품부터 생성형 인공지능(AI) 첨단 제품까지 생산하는 거점이 될 것이라는 게 TSMC 설명이다.

지정학적 위기를 기회로

미·중 패권 경쟁은 일본에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다. 미국은 1986년 미일반도체 협정을 체결해 일본 반도체산업을 고사시킨 나라다. 하지만 중국과 벌이는 기술 경쟁이 첨예해지자 이번에는 최첨단 기술을 제공하면서 일본의 반도체산업을 살리려 하고 있다. 현재 40나노 기술 수준으로 알려진 일본의 반도체 굴기는 정부와 기업이 미국 IBM 기술 지원을 받아 '라피더스'라는 합작 반도체 회사를 설립해 2027년까지 2㎚급 최첨단 반도체를 국산화한다는 목표를 세웠을 정도로 과감하다.

구로다 다다히로 도쿄대 교수는 일본 반도체 부활의 산학협력 중심에 있는 사람이다. 도쿄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도시바에서 20여 년간 반도체 개발에 종사해 오며 학회에서 1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했다. 게이오대에 있다가 TSMC와 협력해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연구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해달라는 도쿄대의 제안을 받아들여 2019년 옮긴다.

그의 도쿄대 이직에 대한 스토리를 들어보면 일본이 비록 반도체 패전국(?)이긴 해도 그 옛날 맺었던 미일 네트워크는 여전히 살아서 작동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시작은 2018년 고노카미 마코토 도쿄대 총장이 TSMC 창업자 모리스 창을 만난 것에서부터다.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이자 TSMC 개발수장을 겸하는 필립 윙도 동석했다고 한다.

세 사람은 반도체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도쿄대와 TSMC가 힘을 합쳐 뭔가 해보자는 데 의기투합했다는 것. 고노카미 총장은 귀국과 동시에 일본-대만의 제휴 프레임을 짰고, 구로다 교수를 스카우트한 것이었다. 업계 관리가 철저한 것으로 유명한 TSMC가 일본 산학계와 연결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구로다 교수는 도쿄대로 옮기자마자인 2019년 10월 대학 내에 시스템디자인 연구센터 '디랩(d.lab)'을 발족한 데 이어 이듬해 2020년 8월에는 첨단시스템기술연구조합 '라스(RasS)'를 세웠다. 그를 도쿄대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반도체 민주주의 시대가 온다

우선 그가 하고 있는 디랩과 라스에 대해 물었다.

"디랩은 회원제로 기업을 모집하고 지식을 공유하면서 오픈 방식으로 과제를 논의하는 이른바 연구자들의 광장입니다. 반도체를 사용해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칩을 만들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 등에 대해 도쿄대 전자공학계 각 연구실과 회원 기업들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논의하면 그걸 형상화한 프로토타입을 TSMC가 제조하는 식입니다."

현재 디랩에 참여한 기업은 몇 곳이나 되나요.

"도쿄대의 제안에 반도체에 직접 관련된 업체뿐 아니라 화학, 정밀기계, 통신, 벤처기업, 상사 등 40여 개 기업이 몰렸습니다. 외국 기업들도 참여했습니다. 차세대 반도체를 개발하자는 공동의 목표 아래 그동안 서로 인연이 없던 기업이 디랩이라는 광장에서 만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픈된 공간이 왜 중요하냐면 반도체 미세화에 한계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기술개발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데 기업들은 효율을 추구하다보니 깊이만 파고 들어갑니다. 옆을 돌아볼 시간도 여력도 없죠.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하면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라스에서는 뭘 하나요.

"개별 기업들과 도쿄대, TSMC가 하는 구체적인 기술개발을 비공개로 진행합니다. 핵심 기업으로는 히타치제작소, 파나소닉, 토판 인쇄, 미라이즈 테크놀로지스 4개사가 가장 먼저 참여했습니다. 각 회사의 프로젝트 내용은 비밀이어서 외부에선 물론 다른 회원사도 볼 수 없습니다. 구체적 목표를 정한 연구개발이기 때문에 억 엔 단위의 개발비를 라스에 투자하는 기업도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반도체 전쟁이 치열합니다.

"지금 50년에 한 번 열릴 만한 큰 무대가 시작되려 합니다. 여태까지 반도체 비즈니스는 값싼 범용 칩을 대량 생산하는 것이 왕도였지만 이제는 개별 주문에 따라 소량 생산하는 전용 칩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시간과 돈이 많이 들지요.

사용자인 기업들이 민첩하게 협업해 설계하려면 컴퓨터에 의한 자동설계가 필수입니다. 소프트웨어를 프로그래밍하는 것만으로 반도체 칩을 자동으로 만들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내세우는 목표는 개발 효율을 현재의 10배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이 도구만 있으면 반도체 개발은 미국이나 중국의 일부 대기업의 독무대가 아니라 여러 작은 기업들도 자체 반도체를 손에 쥘 수 있는 형태가 됩니다. 반도체가 사회의 인프라라면 누구나 반도체 기술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이를 '반도체 민주주의'라고 했다.

반도체에 민주주의를 붙이니 신선하네요.

"오픈하고 연대하고 연계하자는 것입니다. 재료, 장비, 트랜지스터 구조가 다 바뀌는 상황에서 한 회사가 다 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D램 공정이 500단계입니다. 장비 분야를 대략 5개 카테고리라고 할 때 1개에 10개만 해도 50개입니다. 장비 하나에 들어가는 재료만 해도 엄청나죠.

반도체에서 재료라고 하는 건 소재랑 같은 말인데 웨이퍼도 재료입니다. 또 웨이퍼에 전류가 흐르게 하려면 전선을 깔아야 하는데 이때 구리가 쓰이죠. 전선을 만들 때 텅스텐도 쓰이고요.

실리콘 위에 분자 단위로 전자가 많은 물질을 박는 것도 재료고 전선을 깔기 위해 홀을 파거나 메우고 할 때에는 화학약품이 쓰입니다. 우리도 흔히 들었던 '포토 레지스트'는 이때 쓰이는 거죠. 이처럼 500개 공정에 각기 다 다른 재료가 쓰입니다. 제조 공정에서 쓰이는 순수한 물이나 알코올은 또 어떻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루는 반도체 공정에서 재료를 10%만 바꿔도 엄청나지요. 새로운 재료 하나 개발하는 데 10년 이상 걸리는데 이게 또 제대로 양산될지 평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고, 여기서 적어도 2, 3년이 걸립니다. 웨이퍼 한 장에서 한 톨의 반도체가 만들어지는데 평소 두 달 정도 걸리는데 새로운 화학물질을 적용할 경우 적어도 검증을 세 번 정도 거치는 현실을 감안하면 검증 기간만 6개월입니다. 대기업이라면 가능하지만 중소기업은 혼자 다 할 수 있겠느냐는 거죠."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더 많은 사람의 네트워킹을 통해 반도체를 개발하고 사람들이 이 네트워크를 풍요롭게 써야 합니다. 저는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반도체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정기적·비정기적으로 모여서 기술을 발전시키고, 반도체 지식이 없는 사람도 누구나 쓸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법학 전공자들도 'AI를 써서 이런 기능을 하는 반도체가 있으면 좋겠다'는 필요성이 생길 때 이걸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일례로 우리 과에서 학부학과를 개설했는데 천문학과, 의학과 학생들이 오는 거예요. 천문학 전공자들은 '별에서 오는 시그널을 분석하고 싶은데 데이터 계산이 너무 느리다, 이걸 해결하고 싶다'고 했고 의학부 학생들은 '환자 엑스레이 분석에 필요한 칩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만약 설계 자동화 프로그램이 있다면 이렇게 반도체를 모르는 사람들도 자기가 필요한 용도로 만들어서 쓰게끔 하면 됩니다. 저는 음성 명령으로 반도체 제조 프로그램을 만드는 꿈까지 갖고 있습니다."

TSMC와의 산학협력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나요.

"AI에 쓰이는 비메모리 로직 파운드리를 위한 기술협력입니다. 미세화 프로세스에 치중하고 있어요. 2나노 개발을 같이 하려고 하는데 이걸 실현하려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야 합니다. 혼자서는 어려워 산학으로 하려는 것입니다. 해결 과제가 산만큼 많아요(웃음).

일본은 지금 반도체에서 뒤지고 있지만 미일 간 반도체 학자 간 연결고리는 오래됐고 탄탄합니다. 미일 간 반도체 두뇌 네트워크 모임이 1980년대부터 미국과 일본에서 매년 열리고 있으니까요.

‘라피더스'도 평소 이런 네트워크를 쌓아온 시간이 만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IBM의 슈퍼컴 개발자가 있었어요. IBM은 반도체 양산은 안 하고 있지만 꾸준히 첨단기술을 개발 연구하고 있어요. 그 슈퍼컴 개발자가 미국 인텔이 아닌 일본 도쿄 일렉트론(일본 1위 세계 3위 장비회사)의 히가시 데쓰로 회장한테 직접 전화를 걸어 파운드리 공부 모임을 제안했습니다. 정치인, 관료, 산업계 사람 10여 명이 참여해 일본 반도체의 미래는 어떻게 되고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뭘 할 건지를 토의한 거죠. 그러면서 라피더스 설립에 이르게 된 겁니다.

미·중 갈등이 심화되면서 정부에서 보조금 지원이 더는 불법이 아니게 됐잖아요. 미국이 나서서 밀어주니까 전혀 거리낌이 없는 거죠. 옛날에 미일반도체협정으로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패싱'을 당할 때 정부에서 보조금을 주려 해도 세계무역기구(WTO)에 걸렸는데 말이죠. 이런 변화된 환경이 일본 반도체 부활의 '바람'을 일으키는 겁니다.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똑똑한 인재도 많습니다."

한일 상생 반도체 협력을 향해

구체적 상황은요.

"다 아다시피 D램은 쇠퇴했습니다. 삼성과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강하죠. 하지만 컴퓨터에는 D램뿐 아니라 로직을 담당하는 칩도 필요합니다. 그걸 TSMC와 산학협력을 통해 하려는 겁니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2나노 이하 기술입니다. 아직 TSMC도 못 한 거죠.

지금 세계 첨단 학회는 새로운 기술에 대해 한창 고민하고 있습니다. 무어의 법칙이란 게 계속 선폭을 줄여서 칩을 줄이는 것, 한마디로 집적도를 높이는 미세화 공정인데 그 미세화를 계속 이어가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 말고 칩을 여러 개 쌓는 기술도 중요해졌습니다. 어차피 필요한 트랜지스터 개수를 채우는 게 중요하다, 다시 말해 패키지를 잘하자는 것입니다. 어드밴드스드 패키지 혹은 3D 패키지가 그것이죠. 또 다른 축으로는 양자 컴퓨터라든지 아예 웨이퍼 재료를 실리콘이 아닌 다른 것을 쓰거나 바이오 칩처럼 칩의 구조를 바꿔보자는 움직임 등이 있습니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한국 기업들의 강점은 뭐고 약점은 뭘까요.

"지금 잘하고 있는데 이게 앞으로 죽 10년, 20년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도 생각하고 한국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반도체는 기술뿐 아니라 지정학적 문제가 있어서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투명합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삼성이든 SK하이닉스든 TSMC든 라피더스든 브레인들의 아시아 네트워크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도를 놓고 일본 한국 대만을 보면 이번에 TSMC 공장이 들어선 구마모토의 지리적 위치가 매우 중요합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한국-대만의 협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일 간의 차이는 뭐고 협력 분야가 있다면 뭘까요.

"일본은 기술력이나 소재장비가 강하고 한국은 도전 정신, 경영력 마케팅 능력이 강해서 서로 좋은 점을 살려서 협력하면 그야말로 상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도쿄=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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