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장교 8명이 민간인으로 변복하고 왕비 시해 지휘
[근현대사 특강] 왕비 시해 사건의 진실 ①
일본인 어용학자들에 의해 역사 왜곡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은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일본 총리에게 일본의 침략사 자료 공개를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6년간의 준비를 거쳐 2001년 도쿄에 ‘아시아 역사 자료 센터’를 설립하여 국립공문서관, 외무성 외교사료관, 방위성 방위연구소 등 주요 공기록 수장 기관의 침략 관련 자료를 온라인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2009년 재일교포 역사학자 김문자가 새로 공개된 자료들을 이용해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일문)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 즉 청일전쟁의 사령탑인 대본영이 지휘한 사건이라고 밝혔다. 그 주요 내용으로 사건의 진상을 정리해 본다.
1895년 4월 17일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이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국의 ‘완전 독립’과 랴오둥반도의 할양이 중요한 약조였다. 그런데 6일 만인 4월 23일 일본 주재 독일, 프랑스, 러시아 3국 공사들이 랴오둥반도를 청국에 되돌리기를 요구했다. 일본은 당시 구미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 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3국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2억 엔 이상의 전비를 들인 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리품이 사라지게 되었다. 히로시마 대본영은 조선 반도에 병력 일부를 잔류시켜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군사용으로 몇 곳에 시설한 전신선 관리를 이유로 들었다.
지금까지 왕비 시해는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 민간인 ‘장사’들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한성신보』 기자들을 비롯해 남산 일대 거류지 장정 46명이 주범이라고 했다. 사건 후 국제적 비난이 일자 이들은 히로시마 감옥으로 송치되었다. 김문자는 히로시마 대본영 산하 법정에서 육군 장교 8명이 따로 재판을 받은 사실을 찾아내 이들이 변복(變服)을 하고 46명의 민간인을 지휘한 사실을 밝혔다. 재판은 무죄 석방을 내리는 형식적 절차였다.
일본공사관 소속 무관으로 해군 소좌 니이로 도키스케 (新納時亮)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는 행동대가 궁궐로 들어갈 때 히로시마 대본영의 해군 중장 이토 스케유키 (伊東祐亨) 참모차장에게 “지금 훈련대가 대원군을 메고 소리지르며 대궐로 들어갔다”고 전보를 쳤다. 작전 실행에 관한 ‘최초 보고’였다. 이토 중장은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청국 북양함대를 항복시킨 공로로 대본영의 참모차장이 되었다. 해군도 동참한 모양새다.
앞서, 이노우에 공사는 부임 초기 1894년 12월 22일 국왕 알현 때 조선 병사 중 우수한 자들을 뽑아 ‘훈련대’를 신설하여 근위병으로 삼기를 제안했다. 고종은 근위대란 미명으로 자신을 포로로 삼으려는 속뜻으로 읽고 처음부터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노우에 공사는 공사관 소속 무관들을 김홍집 내각의 ‘군부 고문’으로 배치하여 간섭의 통로를 만들었다. 이듬해 1월 훈련대가 발족할 때 국왕 측은 충직한 홍계훈을 훈련대장으로 임명하였으나 일본공사관의 조종을 다 막지 못했다. 군국기무처에서 김홍집 수하로 일본공사관 앞잡이 노릇을 한 우범선이 제2대대 대대장이 되어 수하를 동원해 ‘왕비 살해’ 작전의 일익을 담당했다.
김홍집 친일내각 3개월 간 시해 숨겨
대본영으로부터 특수 임무를 받고 부임한 미우라 공사는 왕비 살해를 대원군이 주도하는 것으로 각본을 짰다. 공사관 소속의 부(副) 무관으로 조선 정부의 ‘군부 고문’을 겸한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를 대원군 동원책으로 삼았다. 오카모토는 조선과의 국교 수립 초기에 대원군을 찾아 면식을 익힌 ‘낭인’이었다. 이노우에 공사는 훈련대 설립을 구상하면서 오카모토를 조선 정부 ‘군부 고문’으로 임명했다. 그도 육군 소좌 출신이었다. 1895년 당시 조선 정부 군부에는 일본인 ‘고문’이 셋이나 되었다.
D-데이인 10월 8일 0시 오카모토는 마포 아소정(我笑亭)에 칩거 중인 대원군을 대면하고 있었다. 온갖 감언이설로 대원군이 나서주기를 간했다. 50여 명의 행동대가 경복궁으로 진입하는 데 “대원군 납시오”라는 호령이 필요했다. 미우라 공사와 대원군 사이에 통치권 부여 사전 약속이 있었다는 설이 있으나 김문자는 믿기 어렵다고 했다. 대원군으로서는 지난해 7월 27일 오토리 (大鳥) 공사가 자신에게 ‘내정개혁’ 참여를 권해놓고 군국기무처 설립 후 오히려 은퇴를 종용한 일을 생각하면 응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1년 전 ‘김학우 살해 사건’에 연루되어 아직 유배 중인 장손 이준용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대원군은 2시간 이상 망설이던 끝에 우범선의 훈련대 병사들이 준비해 대기 중인 가마에 올랐다.
대원군을 앞세운 오카모토 일행은 새벽 4시 전후 서대문에 도착했다. 거기서 만나기로 한 ‘장사’ 패 일부가 도착하지 않아 30여 분을 소모한 뒤 광화문으로 향했다. 건청궁에서 새벽 4시까지 임무를 끝내고 행동대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그러나 5시30분 광화문을 통과한 뒤 훈련대장 홍계희와 시위대 병력 일부를 만나 이를 처치하고 건청궁으로 향했을 때는 이미 아침 7시가 다 되고 있었다. 왕비를 어렵게 찾아 살해했을 때 일본인의 만행이라는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건청궁 내 숙소를 둔 미국인 장군 다이와 러시아 건축가 세레딘사바틴 등이 며칠 뒤 외국 신문에 밝혀 일본은 국제적 비난 속에 휩싸였다. 김문자는 작전 계획의 지연 결과를 대원군의 본의 아닌 ‘공로’로 평했다.
왕비 시해 사건 후 다시 들어선 김홍집 내각은 10월 10일 국왕 몰래 ‘폐비 조서’를 내리고 3개월간 시해 사실을 숨겼다. 왕은 이듬해 2월 11일 새벽 건청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가서 ‘폐비 조서’가 거짓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김홍집, 정병하 등은 거리에서 맞아 죽고 김홍집 내각의 핵심 노릇을 한 유길준은 일본으로 도망갔다. 유길준은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시해당한 왕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면서 실각을 변명했다. ‘장사’ 패로 활약한 『한성신보』 기쿠치 겐조(池菊謙讓)는 1910년 6월 『대원군 전』을 지어 우리는 조선의 ‘진정한 호걸’ 대원군을 도왔을 뿐이라고 발뺌했다. 국가 범죄 ‘왕비 시해’ 사건의 은폐 작전이 『한성신보』의 본사 격인 『고쿠민(國民) 신문』을 중심으로 따로 은밀히 진행되었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