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이야기가 위험한 이유[살며 생각하며]

2024. 3. 22.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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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만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자신의 신념을 절대적 善 확신
그 믿음 위협 땐 강렬한 불쾌감
선거철의 소모적인 정치 논쟁
가족·친구·지인과 ‘감정의 골’
쿨하게 정당.후보자 보고 한 표
주변인이 누굴 찍든 간섭 말라

며칠 전 지인들과 저녁 모임을 하기 위해 뒷골목에 있는 한 허름한 한정식집엘 갔는데, 입구에 이런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종교 이야기 하지 마라. 정치 이야기 하지 마라. 군대 이야기 하지 마라’. 재미있는 문구에 모두 옳은 말이라고 공감하며 웃었다. 경고문 덕분인지 그날 모임에서는 종교와 정치 이야기를 짧게 하고 각자 개인적 근황을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가까운 사람을 만나면 서로의 관심사를 이야기하게 된다. 요즘은 선거철이니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다. 그런데 문제는 서로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 지도자가 다를 경우다. 좋아하는 취미가 다르고 응원하는 스포츠 스타가 다르더라도 이러한 차이로 다투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 지도자가 다르면, 강렬한 감정이 유발된다. 그래서 정치 이야기는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지고 상대방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는 일이 흔하다. 정치 이야기는 오랜 친구들을 갈라놓고 가족 갈등을 유발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우리는 왜 정치 이야기에 격렬한 감정을 개입시키는 것일까? 자신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 불쾌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혐오감과 분노까지 느끼는 것일까?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도 될 일을 바득바득 반박하며 상대방의 생각에 도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랜 기간 쌓아온 우정을 희생시킬 만큼 정치적인 견해 차이가 중요한 것일까? 정치 이야기가 이토록 위험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에 답하려고 노력한 학자 중 한 명이 문화인류학자인 어니스트 베커다. 그는 저서 ‘죽음의 부정’에서 인간 사회에 폭력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심리적 이유를 분석했다. 이 책은 1973년에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사회 현상과 집단심리를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베커는 심층심리학적 관점에서 문화 현상을 설명하는 매우 심오한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풀어서 요약하면, 종교와 정치는 죽음을 부정하고 불멸(不滅)을 추구하는 영웅 심리와 깊이 관련된 문화 현상이다. 인간은 죽음도 이길 수 있는 영웅적 존재가 되려는 무의식적 동기를 지닌다. 종교나 정치 지도자들은 영웅이 되어 상징적 불멸을 추구하고, 대중은 지도자에 동조하고 동일시하면서 심리적 안전감과 불멸감을 얻는다.

죽음의 불안에서 벗어나 불멸감을 느끼려면 자신의 신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하므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신념을 전파하는 동시에 자신과 다른 신념을 부정하게 된다. 특히, 자신의 신념에 도전하는 사람은 절대적 믿음과 불멸감을 위협하므로 그런 사람들에게 강렬한 불쾌감과 분노를 느낄 뿐 아니라, 사악한 자로 매도하며 폭력을 정당화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폭력과 치열한 전쟁은 대개 종교나 정치와 연관되어 있다. 베커는 죽음을 부정하고 불멸을 추구하는 영웅 심리와 그에 동조하는 군중심리가 거악의 심리적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자신의 신념을 영원한 진리이자 절대적 선(善)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위험하다. 냉철하기로 유명한 독일인들도 히틀러라는 영웅의 선동에 휘말려 역사상 가장 잔혹한 학살을 자행했다. 베커의 주장은 사회심리학자들에 의해 ‘공포관리이론’으로 발전했으며 많은 실험적 연구를 통해 지지되고 있다.

베커의 주장을 받아들이든 아니든, 종교와 정치 이야기는 우리 마음의 깊은 곳을 건드리기 때문에 격렬한 감정을 유발한다. 자신과 다른 신념을 지닌 사람이 어리석어 보이고 혐오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상대방의 신념에 도전하고 반박하며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종교나 정치적 신념에 도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더구나 그러한 신념을 변화시키려는 것은 무모한 일이기도 하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두 친구가 밤새 끝장 토론을 했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헤어졌다고 한다.

역사는 영웅들의 이야기다. 영웅은 역사에 이름을 남겨 상징적 불멸을 이루지만, 대다수 사람은 영웅들의 싸움에 휩쓸려 희생되면서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진다. 인간 사회를 하늘에서 보면, 개미 사회와 다를 바 없다. 여왕개미를 중심으로 병정개미와 일개미가 몰려다닌다. 여왕개미에 해당하는 정치 지도자들은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여 세력을 키우기 위해 다양한 유혹 전략을 구사한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세상에 불만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러한 유혹에 휘말려 정치나 종교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마음이 불안하고 외로운 사람은 종교나 정치 집단에 참여하면서 소속감과 유대감을 느끼고 심리적 위로와 안정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종교나 정치 이야기로 가까운 사람들과 멀어지는 일이다. 가족이든 친구든 주변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선거철에는 정치 이야기로 소모적 논쟁을 하면서 가까운 사람과 감정의 골을 만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선거 결과와 깊은 이해관계를 지닌 사람들은 목이 터지도록 떠들어야겠지만,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쿨’하게 정당과 후보자를 살펴보고 한 표를 행사하면 된다. 가까운 사람이 누구에게 투표하는지는 그 사람의 자유이므로 간섭할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의 의견이 중요하므로 선거 결과에 승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선거가 끝나면 항상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된다.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항상 내 마음과 같지 않듯이, 세상이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권석만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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