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수출도, AI시대 비메모리도 부진…‘반도체 강국’ 비상
메모리에 갇힌 한국
830억달러(2018년) vs 429억달러(2023년)
5년 새 메모리반도체 수출액은 반토막 났다. 특히 최근 2년은 매년 수출액 감소율이 두자릿수에 이르렀다.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국내 반도체 회사의 세계 메모리 시장 점유율은 10여년 동안 줄곧 60% 안팎에 이를 정도로 독과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나타난 수출액 급변이다. 전문가들은 업황에 따라 크게 춤을 추는 메모리 중심의 국내 반도체 산업 구조에 내재한 약점이 확연히 드러난 지난 2년이라고 평가한다.
상대적으로 안정적 성장을 하는 시장인 비메모리반도체에서 한국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산업연구원의 자료를 보면 나라별 비메모리 점유율(매출 기준)은 한국은 3.3%로 대만(10.3%), 일본(9.2%), 중국(6.5%)보다도 뒤처진다. 반도체 설계 분야가 강한 미국이 54.5%를 차지하고 있다. 전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 비중은 23.88%(시장 규모 187조원), 비메모리는 76.12%(593조원)다. 작은 시장에서만 한국은 강한 존재감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비메모리로 사업 확장에 난항
반도체 강국에 비상등이 켜진 건 한국 반도체 산업을 이끈 삼성전자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메모리 부문에서도 경쟁력을 위협받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DS) 안팎에선 “사면초가”라는 반응까지 나온다.
대규모 투자를 통해 범용 반도체 시장을 발빠르게 선점하는 데 성공했던 삼성의 전략이 주문생산에 가까워진 인공지능(AI) 시대의 새 반도체 지형에 잘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주력인 디(D)램 범주에 속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에이치비엠)다. 인공지능 서버용 그래픽처리장치(GPU)에 필수로 들어가는 에이치비엠은 챗지피티(ChatGPT) 열풍 등으로 지난해부터 수요가 급격히 늘었지만, 삼성전자는 4세대 에이치비엠3부터 패키징 관련 기술 문제로 그래픽처리장치를 독점하고 있는 엔비디아에 공급하지 못했다. 삼성을 쫓던 에스케이하이닉스가 사실상 공급을 독점했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인공지능 시대 들어서 범용 반도체였던 디램도 패키징 같은 고객 맞춤형 기술들이 중요해지는데 삼성의 경쟁력이 밀리고 있다. 에이치비엠뿐 아니라 더블데이터레이트(DDR)에서도 기술력 이슈가 있어서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삼성 내부의 위기가 커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삼성이 2019년 에이치비엠 개발팀을 해체한 건 삼성이 미래 동향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사례로 꼽힌다. 익명을 요청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에이치비엠2 제품까지 시장 우위를 차지했던 삼성이 2019년에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에이치비엠 개발팀을 해체했다. 당시 다운턴(하강 국면)에 대응하려는 선택이었지만, 미래를 읽지 못한 단기 전략이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 초기에 고전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비메모리 분야에선 수년에 걸쳐 도전을 하고 있으나 경쟁자를 멀찌감치서 뒤쫒는 형국이다. 비메모리 반도체를 만드는 영역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에서 1위 업체인 대만 티에스엠시(TSMC)가 애플과 엔비디아, 에이엠디(AMD) 등 대형 고객사들을 확보해 1위 입지를 탄탄히 다지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의 대형 고객사 수주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삼성전자는 가전 및 스마트폰 자체 칩 생산과 티에스엠시에 집중된 물량을 분산해 받는 전략으로 2위 자리를 지키는 상황이다. 최근엔 미국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에 다시 진출하면서 삼성을 밀어내고 2위로 올라서겠다고 위협하는 상황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의 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4분기 전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티에스엠시가 61.2%, 삼성전자가 11.3%였다. 전 분기와 견줘 삼성의 점유율은 1.1%포인트 줄었고, 티에스엠시 점유율은 3.3%포인트 더 늘어 격차가 벌어졌다.
이승우 센터장은 “삼성이 3㎚(나노미터)부터 먼저 도입한 게이트 올 어라운드(GAA·지에이에이) 공정에서 수율이 떨어져 고객사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이런 추세라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해 시스템반도체(설계+파운드리) 분야에서 1위에 오른다고 밝힌 목표 달성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게 시장 반응이다.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시스템 반도체인 에이피(AP) 영역에서 삼성은 지난 2018년 시장점유율을 16.3%(전세계 2위)까지 올렸다가, 지난해 7.6%(3위)로 다시 내려갔다. 2015년 2.4%에서 시작해 성장하던 흐름이 뒷걸음질 친 것이다.
산업정책 경쟁의 시대
자국의 안보를 위해 경제적 수단을 활용하는 이른바 ‘지경학’ 시대의 도래는 삼성전자를 포함해 한국 반도체 산업에 또 다른 도전을 안겨주고 있다. 특히 주요 나라와 산업이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인공지능 산업의 확대는 반도체 ‘붐’을 일으키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 자율주행, 온디바이스 인공지능 등의 동시다발적인 발달은 여기에 필요한 반도체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리고 있다.
최도연 에스케이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오픈에이아이 샘 올트먼 대표가 인공지능 칩 공급망 구축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조달한다는 계획은 인공지능 산업에 엄청난 규모의 부가가치가 대기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아마존과 구글 같은 플랫폼 업체들이 차별적인 인공지능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칩을 설계하려는 움직임은 에스케이하이닉스(주문형 메모리), 삼성전자(파운드리 및 메모리)에 칩을 주문하는 수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파운드리도 비장의 무기를 준비하고 있다. 삼성이 3㎚부터 지에이에이 공정을 먼저 적용한 만큼 2㎚부터 지에이에이를 적용하는 티에스엠시와의 수율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동원 케이비(KB)증권 연구원은 “삼성은 2㎚부터 3세대 지에이에이를 적용하는데 티에스엠시의 1세대 지에이에이 공정과 비교해 성능 및 전력 효율이 우수할 것으로 전망된다. 2㎚부터 삼성 선단 공정의 수주가 증가할 것으로 보여 티에스엠시와 대등한 기술 경쟁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미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도 중국의 첨단 기술 개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중국 정부가 ‘반도체 굴기’를 내세우며 자국 업체에 막대한 자금을 퍼부으며 한국 업체를 쫓고 있는 상황에서, 장비 수출 통제는 삼성과 하이닉스에 기술 격차를 벌릴 시간을 만들었다.
이에 정부는 경기 남부에 2047년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집적단지)를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은 상황이다. 삼성전자와 에스케이하이닉스가 622조원을 투자하고, 정부는 세제 혜택과 전력·용수 등 인프라 구축, 인력 양성 등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지난해 반도체 투자세액공제를 25%까지 확대했고, 올해 반도체 지원 예산(1조3천억원)을 지난해보다 2배 이상 늘렸다. 메모리반도체 1위에까지 오른 기업의 저력과 결합한다면 ‘칩워’에서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다만 외부 요인은 언제나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미국·일본·중국·대만 등 주요 반도체 국가가 모두 전략적으로 반도체 팹(공장) 경쟁에 뛰어들면서 향후 2∼3년 내의 반도체 시장 상황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MIE)가 조사한 2022년부터 2026년까지 지어질 국가별 12인치(300㎜) 웨이퍼 첨단 팹 개수를 보면, 중국은 25개, 미국은 14개, 대만은 13개, 유럽연합(이스라엘 포함)은 9개, 일본은 8개의 새 첨단 팹을 건설 중이다. 정형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반도체 주요 생산국들이 정부 지원을 통한 자국 중심 반도체 생태계 조성 정책을 추진하고 있어 우리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과 위상이 약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범진욱 서강대 교수(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과잉투자가 우려될 정도로 반도체 산업에 많은 투자가 이뤄지고 있어, 2∼3년 후에 경쟁이 다시 심화되는 시기가 올 수 있다”며 “미국의 새로운 팹 가동 시기에 국내 반도체 인력이 대량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와 공급 과잉 문제에 대해 미래를 내다보며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끝>
옥기원 김회승 기자 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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