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선거판의 백의민족
파라오를 숭상한 고대 이집트인들은 흰옷을 즐겨 입었다. 흰색은 태양을 상징했다. 그리스와 로마에선 신부에게 흰 예복을 입혔다. 순결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바로크 시대엔 천사를 하얗게 표현했다. 흰색은 정치적 순결도 의미했다. 로마 집정관과 원로원 의원들은 흰색 양모 토가를 걸쳤다. 공직의 상징이었다. 영어의 공직 선거 후보자 ‘candidate’는 ‘흰옷을 입은 사람’이란 의미의 로마어 ‘Candidatus’에서 유래했다. 정부 보고서도 ‘백서(white paper)’라 부른다.
▶우리는 삼국 시대 전부터 흰옷을 즐겨 입어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했다. 중국 ‘위지(魏志)’에 따르면 부여인들은 흰색 도포와 바지를 입었다. 태양을 숭배하는 제천(祭天) 신앙의 영향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엔 나라에서 흰옷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때가 잘 타 빨래 품이 많이 들고 청색을 숭상하는 유교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일제 때는 흰옷을 입으면 관공서 출입을 금지하고 먹물을 뿌렸다. 그래도 막지 못했다. 3·1 운동이나 의병 봉기 때는 온통 흰색 물결이었다.
▶장수가 전쟁에 져 징계당하면 백의종군(白衣從軍)했다. 정치권에선 정치적 재기를 도모할 때 이 말을 썼다. 2012년 김무성 전 대표는 새누리당 공천에서 밀리자 불출마를 선언한 뒤 흰 점퍼를 입고 지원 유세에 나왔다.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최근 공천 탈락 뒤 “백의종군하겠다”고 했다.
▶2016년 당시 새누리당을 탈당한 유승민·윤상현·주호영·안상수 의원은 앞다퉈 흰색 점퍼를 입고 유세했다. 흰색의 상징 효과에 억울한 마음까지 담았을 것이다. 2020년 총선 때 호남에서 민생당으로 출마한 천정배 후보는 당색인 녹색 대신 흰옷을 입었다. 지난 대선 때 윤석열 대통령과 후보 단일화를 한 안철수 의원도 흰 점퍼를 입고 지원 유세를 했다.
▶총선을 20여 일 앞둔 선거판에 또다시 ‘흰 점퍼’가 등장했다. 이른바 험지에 출마한 후보들이다. 민주당으로 서울 서초을에 출마한 홍익표, 강남을에 출마한 강청희 후보는 민주당 색인 파란색 대신 흰색 점퍼를 입었다. 기호·이름만 파란색이다. 지역에선 “민주당 후보인 줄 몰랐다”는 유권자도 있다. 국민의힘으로 수원정에 출마한 이수정, 서울 동작을의 나경원, 중·성동갑의 윤희숙 후보도 흰색 패딩 차림이다. 모두 어려운 지역이다. 지역 내 거부감을 줄여 지지율 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오죽 답답하면 이런 탈색 전략을 쓰겠나 싶다. 그게 먹힐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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