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1000명의 ‘면역기억’ 담은 백과사전 ...암 ·자가면역질환 길 열리나
바이러스 면역학 분야의 국내 전문가인 신의철 기초과학연구원(IBS)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 바이러스면역연구센터장 겸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는 21일 “면역 세포의 한 종류인 T 세포와 관련된 정보를 파악하면 면역의 전반적인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다”며 “질병의 예후를 예측하거나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 센터장은 이날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IBS 과학미디어아카데미에서 “T 세포를 연구하며 주요 질병들이 면역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며 “바이러스에 감염되거나 백신을 접종하며 형성된 ‘면역 기억’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신 센터장은 앞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연구해 오미크론(BA.2) 변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는 바이러스 정보를 저장해뒀다가 다른 변이에도 면역력을 갖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2018년에는 방관자 T세포 활성화(Bystander T-cell activation) 현상을 세계 최초로 증명한 뒤 최근까지 방관자 T 세포의 역할과 관련 메커니즘을 규명하고 있다.
우리 몸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를 면역 세포의 한 종류인 수지상 세포가 잡아먹는다. 일반적으로 대식세포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를 먹어 없애지만 수지상 세포는 면역과 관련된 기억을 만든다. 가까운 림프절로 바이러스에 걸린 세포를 가져가 이에 맞는 특이적인 T 세포를 활성화해 증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단순히 바이러스 감염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중증 질환이 나타나기도 한다. 신 센터장은 A형 간염 사례를 살펴 바이러스와 상관없는 T 세포인 ‘방관자 T 세포’가 활성화되면서 과잉 면역 반응이 일어나 염증과 조직 손상 같은 중증 질환을 일으키는 것을 밝혔다. 기존에 면역 반응을 거쳤던 기억 세포가 덩달아 작동한 결과다.
이날 신 센터장은 “이 내용은 특정 항원에 대해 특이성을 보이는 T 세포만 움직인다는 ‘항원특이성’ 이론에 반하는 사례”라며 “1990년대 이미 발견된 바 있으나 현상이 일어날 확률이 별로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나와 30년 가까이 관련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종합하면 방관자 T세포는 A형 간염과 원형탈모증, B·C형 간염, 지카 바이러스에서도 나타난다. 신 센터장은 “바이러스 종류나 면역 체계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라며 “방관자 T세포를 막는 약물을 사용하면 질병을 개선할 수도 있고, 면역 기억을 가진 세포를 없애는 약물을 사용하면 이식 거부 반응을 없애거나 회춘까지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신 센터장은 한 개인의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 기억을 분석하는 ‘면역 기억 백과사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와 유사하게 백신을 맞았거나 바이러스에 감염됐던 경험, 항원에 노출된 경험과 같은 면역 기억을 모두 파악하는 프로젝트다. 신 센터장은 이를 통해 방관자 T세포와 같은 이상 현상은 물론 전반적인 면역 메커니즘을 볼 수 있을 거라 보고 있다.
신 센터장 연구진은 현재 한국인 남녀 2명의 면역 기억을 분석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체의 11%를 해석해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이나 인플루엔자, 결핵과 같은 바이러스에 대한 흔적을 발견했다. 신 센터장은 20% 이상 해석해 면역 기억 데이터를 쌓는 것이 목표다.
신 센터장은 “한 사람의 데이터를 분석하는데 약 5억원이 들지만, 차근차근 1000명분의 데이터를 확보하면 한국인의 면역 기억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새로운 사람의 데이터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 설명했다. 이어 “이렇게 만들어진 면역 기억 백과사전은 자가면역질환이나 암, 이식 거부 반응과 관련된 T세포를 추려내고, AI를 도입해 질병 예후를 예측하거나 세포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적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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