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파이프 다리에 사람 얼굴…백남준의 ‘로봇 K’를 잇다

노형석 기자 2024. 3. 2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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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준 작가 ‘올해의 작가상’ 전시
권병준 작가의 근작인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로봇’(2023). 노형석 기자

1964년, 야심만만했던 32살 청년작가 백남준은 미국 뉴욕 맨해튼 거리에서 로봇 퍼포먼스 무대를 펼쳤다.

손수 모터를 부착하고 비닐 등의 여러 오브제들을 짜깁기해 붙인 허접한 차림새의 수제 로봇 ‘케이(K)-456’을 보도에 올려놓고 행인들과 같이 걷게 한 것이었다. 로봇 이름은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18번의 쾨헬 번호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거창해 보였지만, 의도했던 대로 퍼포먼스가

굴러가진 않았다. 행인들 보행 속도와 맞추기엔 로봇 발걸음이 너무 굼떴다. 동작도 자연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불과 1년 전 총에 맞아 암살된 존 에프(F)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 육성을 라디오 스피커가 부착된 입 부분으로 내뱉고 한편으론 배설을 하듯 몸에서 콩을 흩뿌리는, 로봇답지 않은 풍자적 행동에 많은 행인과 미술인들은 재미를 느끼며 갈채를 보냈다.

‘로봇 K-456’은 백남준과 여러 퍼포먼스를 함께 했다. 이후 티브이아트를 본격적으로 펼칠 때도 늘 함께 전시되면서 인간적 테크놀로지라는 작가 특유의 화두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이 헐렁이 로봇은 1982년 최후를 맞는다. 그해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첫 백남준 회고전 때 길을 건너다 자동차에 치이는 교통사고 퍼포먼스에 나와 으스러지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백남준은 퍼포먼스를 두고 “21세기 최초의 참사”라고 일컬었는데, 과학과 기술을 맹신하는 현대문명의 합리주의가 지닌 허실을 꼬집는 현대미술사의 사건으로 남게 된다.

지난달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로 뽑힌 권병준 작가의 로봇극장 역시 백남준이 60년 전 ‘K-456’에서 보여준 인간적인 테크놀로지 미학을 계승한 작품으로 비친다. 작가의 로봇극장은 지난해 10월부터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에서 열리고 있는 올해의 작가상 후보작가 4명의 전시회 가운데 일부다.

바퀴 달린 사다리를 하체로 삼아 궤도 위를 움직이는 권병준 작가의 로봇 조형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 1층에 마련된 올해의 작가 전에 선보이는 중이다. 노형석 기자

4전시실에 개설된 이 극장 공간엔 손과 다리, 머리를 간신히 꼼지락거리는 듯한 여러 종류의 수제 로봇들이 몸짓 연기를 펼치고 있다. 외나무다리 같은 한줄의 쇠파이프 위에 역시 쇠파이프로 된 하반신을 부착시킨 채 사람 얼굴과 사람 손·팔 모양의 껍데기를 두른 채 팔을 흔드는 로봇, 얼굴 부위에 손전등을 부착하고 망사치마와 꽃잎을 몸에 걸치고 부채를 흔들면서 춤추는 로봇, 하반신의 사다리를 오므렸다 펴면서 궤도 위를 기어가는 듯한 오체투지 로봇 등이 눈길을 끈다.

이 로봇들은 작가의 꾸준한 손길을 받아야 작동되고 유지될 수 있는 섬약한 존재들이다. 인간을 능가하는 작업 능력을 자랑하는 산업현장의 로봇 전사들과는 상반되는 나약한 면모에 소극적인 움직임이 대비된다. 머리 부분의 손전등을 서로 조명으로 비추면서 손을 떨며 머뭇머뭇하거나 힘겹게 기어가거나 팔을 휘젓는 그들의 모습이 벽면에 그림자극처럼 투영된다. 기계 답지 않은 손의 떨림, 빛나는 눈 형상의 손전등 머리통 등의 기괴하고 허름한 모습들은 정밀한 기계 장치 로봇이라기보다는 작가의 감정 내면을 투영하는 일종의 페르소나(분신)처럼 구실한다. 강력한 로봇의 힘과 외양이 지닌 통속적 면모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인간보다 더 나약하고 심약하고 해 보이는 자태는 부조리해 보이기까지 한다. 로봇에서 되려 인간적 연민을 느끼게 하는 독특한 극장식 전시 연출은 너무도 인간적인 기계문명의 미래를 구현해보고 싶다는 갈망과도 잇닿은 것으로 보인다.

권병준 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90년대~2000년대 초 삐삐 롱스타킹 등 인디밴드에서 활동했으며, 그 뒤로 공연·미술판에서 사운드·미디어아트 작업에 전념해온 작가는 홍대 앞 밴드 공연무대의 기억을 살려 로봇이 인간의 감정으로 몸짓하고 연기하는 기계극장(메커니컬 시어터) 무대를 수년간 계속 시도해 왔다. 이번 작업들 또한 2018년 대안공간 루프의 ‘클럽 골든 플라워’와 2020년 서울 강남 플랫폼 엘에서 공연했던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의 연장 선상으로 볼 수 있는데, 공학적 메커니즘과는 다른 차원의 안무와 연기 맥락에서 인간적 심리와 감정 등을 서사적으로 더욱 정교하게 음향과 더불어 표출하는 경지로 나가고 있다. 인공지능(AI)과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로봇 시스템이 확산하는 현재 상황에서, 거꾸로 인간처럼 번민하고 감정에 휘둘리는 약한 로봇의 서사가 어떻게 이어질지 주목된다. 삶과 죽음을 이해하고 고독과 따듯한 감성을 느끼는 존재로서, 인간의 온기가 흐르는 미래의 테크놀로지 문명을 소망했던 백남준 예술의 색다른 버전으로 비치는 전시다. 31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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