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플라자] ‘소라’가 만든 영상이 남긴 의문
일이 바빠져 저녁을 거른 채 배를 부여잡고 귀가했다. 그날따라 무슨 일인지 함께 사는 형제가 온몸에 이불을 둘둘 싸매고 거실로 나와 배고프냐 묻기에 냉큼 그렇다 했더니 늦은 저녁을 차려주었다. 상을 차려주고는 앞에 앉아 본격적으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수다의 재료는 챗GPT를 개발한 오픈 AI가 내놓은 새로운 생성형 인공지능 모델 소라(Sora)였다. 으레 형제들이 나누는 대화가 그렇듯 의미 없는 리액션만 반복하다 피곤을 더 이상 이길 수 없어 이만 방에 들어가려던 차에, 내 발목을 잡아챈 건 다름 아닌 도쿄의 밤거리를 걷는 어느 세련된 여성이었다.
‘소라’는 텍스트를 입력하면 비디오를 생성하는 인공지능 모델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원하는 장면을 텍스트로 입력하면 영상으로 뚝딱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내가 본 영상도 몇 가지 문장(’세련된 여성이 네온사인과 간판으로 가득한 도쿄 거리를 걷고 있다’와 같은)만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영상을 몇 배로 확대해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누군가 도쿄에서 직접 찍은 실제 영상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다. 새로운 영상을 생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존 영상의 배경을 바꾸거나, 두 영상을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합치는 등 영상 편집에도 응용할 수 있다고 한다.
영화를 전공한 나와 내 친구들이 대학 시절부터 줄곧 오랜 시간을 들여 배워 온 것들을 ‘소라’는 간단히 엔터키 하나로 해냈다. 어쩐지 허탈하다. 오늘의 나는 그 ‘간단’한 걸 하느라 야근에 저녁도 걸렀는데. 문득 유튜브에 떠도는 AI 커버 영상들이 떠올랐다. 가수들이 본인은 부른 적도 없는 노래에 자기 목소리를 인공지능으로 입힌 노래를 듣고 이런 기분이었을까.
우리 세대만큼 세상이 10년 단위로 뒤집히는 세대가 또 있었을까? 간단하게 음악 감상의 변천사만 떠올려봐도, 10대 때는 휴대용 카세트 ‘마이마이’를 들고 다녔고, 교복을 입었을 때는 미키마우스 MP3가 나왔다. 20대에는 스마트폰으로 노래를 들었고, 30대가 되니 기가 차게도 가수가 직접 부르지 않은 노래까지 AI로 만들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100년씩의 기간을 두고 봐도 급진적일 변화들이 순식간에 닥쳐오고, 이내 보통의 삶이 되어갔다.
그 말은 이제 곧 글 몇 줄로 영상을 뚝딱 만들어내는 일이 일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이제는 영상을 만드는 데 사람의 손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영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을 AI로 만들 수 있게 됐다. 글, 그림, 영상 배경, 하물며 배우의 얼굴, 머지않아 연기까지. 문제는 이 AI가 ‘오리지널’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점인데, 그렇다는 건 높은 확률로 누군가의 저작물을 침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AI는 도덕성을 학습할 수 없으니, 얼마나 많은 이에게 이 기술이 독이 될지 가늠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딥페이크 범죄에 대한 생각도 지울 수가 없다. ‘누구나 원하는 영상을 텍스트 몇 줄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문장은 그 자체로 위험하게 느껴진다. 이 기술이 일반에 공개되었을 때 여성의 삶에는 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언젠가 친구와 카메라의 발명이 여성의 삶에 어떤 불안을 불러왔는지에 대해 대화한 적 있다. 우리는 ‘그’ 카메라를 공부해 그로 인해 먹고 살고 있지만, 그 카메라 탓에 죽어간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카메라가 숨기기 좋을 만큼 작아지고, 누구나 손에 쥐고 다닐 수 있을 만큼 보급되는 동안 여성들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어 왔나.
이제는 직접 찍지 않아도 누군가의 얼굴로 영상을 만들 수 있다. 도덕성을 학습할 수 없는 AI를 인간이 통제할 수 있을까? 진짜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가 망가진 이후에는 어떤 정보를 어떤 기준으로, 어떤 거름망으로 걸러낼 수 있나. 고민 없는 기술 발전이 그만한 가치를 남길 수 있을지 의문이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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