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밸류업과 손발 안 맞는 국민연금

나지홍 기자 2024. 3. 2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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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캐나다 등 공적연금은 자국 주식 투자 확대가 대세
한국선 연금개혁 장기 표류로 주식시장 대들보 역할 못해
2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 종합상담실로 한 시민이 상담을 받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2023.11.22/뉴스1

맨션하우스(the Mansion House)는 영국 런던시장의 관저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매년 7월 내각 2인자인 재무장관이 경제 분야 연례 연설을 하는 곳이다. 제러미 헌트 영국 재무장관은 지난해 7월 연설에서 “영국 경제의 경쟁력 회복을 위해 공적 연금들이 영국 주식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영국을 대표하는 9개 공적 연금은 ‘자산의 5% 이상을 성장 가능성이 높은 비상장 주식 등에 투자한다’는 내용의 ‘맨션하우스 협약’을 체결했다. 9개 연금이 5000억파운드(약 850조원)에 달하는 자산 중 0.5%에 불과한 스타트업(신생 기업) 투자 비율을 2030년까지 10배로 늘리겠다는 것이다.

영국이 비상장 주식에 주목하는 것은 스타트업부터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이어지는 기업 생태계를 살리기 위해서다. 헌트 장관은 “매년 런던 증시에 신규 상장하는 기업 수가 1997~2019년 사이에 44% 감소했다”고 했다. 새내기 유망주 공급이 줄어드니 증시가 침체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영국 공적 연금은 자국(自國) 자본시장 발전에 제 역할을 못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1997년만 해도 연금 자산의 50%를 넘었던 영국 주식 투자 비율은 2021년 6%까지 쪼그라들었다. 반면 해외 주식 비율은 21%로 확대됐다.

주식도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상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영국의 대책은 맥을 잘 짚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품질 좋고 가격이 합리적인 상품이라고 모두 잘 팔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상의 가성비를 갖춘 에어컨도 북극에서는 팔리지 않을 것이다. 원하는 소비자가 없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에선 이 소비자가 바로 투자자다.

그런데 주식을 사는 투자자들이 외국인으로 편중되면 국부 유출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주가 상승의 과실을 외국인들이 독식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 영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은 공적 연금의 증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캐나다는 지난해 11월 연금의 국내 투자 확대 방안을 발표했다. 연금이 특정 기업의 주식을 최대 30%까지 보유하게 제한하는 규제를 국내 주식에 한해 완화한다는 것이다. 캐나다 연금도 영국처럼 국내 투자 비율이 낮다. ‘메이플8(Maple8)’로 불리는 캐나다 대형 연금 8곳의 국내 주식 비율은 2000년 28%에서 지난해 3%까지 급감했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정부의 밸류업(기업 가치 상승) 정책에 호응하는 국내 매수 세력이 없다. 올 들어 외국인들이 유가증권시장에서 10조원 넘게 순매수하는 동안, 기관과 개인은 각각 5조원 넘게 순매도했다. 이 기간에 국민연금이 주축이 된 연기금도 주식을 팔아치웠다.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보유액은 2020년 177조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뒤 지난해 141조원으로 줄었다. 국내 주식 비율도 같은 기간 21.2%에서 14.1%로 떨어졌다. 반면 해외 주식 보유액은 같은 기간 193조원에서 303조원으로 급증했다.

국민연금이 다른 나라처럼 국내 증시의 대들보 역할을 하려면 2050년대로 예정된 기금 고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덜 내고 더 받는’ 현재의 요율 체계를 개편해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국민연금 개혁 논의가 10년 넘게 무성했지만, 정치적 부담 때문에 한 번도 결론이 난 적이 없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가 돼버린 난제(難題) 해결이 쉽지 않다면,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한꺼번에 풀려 하지 말고 작은 매듭부터 푸는 지혜가 필요하다. 거창한 개혁에 목매기보다 국민연금과 증시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이 뭐가 있을지 찾아보는 게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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