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묵의 90년대생 시선] 세계화 멈춤? 非서구에선 중단 없이 달린다
2월 14일,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 도착했다. 바쿠는 러시아 제국 치하에서 대규모 석유 단지로 개발되면서 급성장한 도시다. 그래서 그런지 바쿠 최대 번화가인 사힐 구역은 러시아 여느 대도시 못지않은, 화려하고 웅장한 러시아식 건물들을 뽐내고 있었다. 한편 도시 외곽으로 나가면, 소련 시대에 세워진 시가지가 눈에 들어오는데, 한국인에게도 무척 친숙한 소련식 아파트가 즐비했다. 러시아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수많은 표준을 제공하거나 강요했다. 번창하는 석유 도시로 수많은 민족이 이주해 왔고, 그들의 소통은 오직 제국 언어인 러시아어로만 가능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독립한 뒤 30년이 훌쩍 넘게 지난 지금, 바쿠의 내면은 달라졌다. 아제르바이잔어와 거의 같은 언어라고도 할 수 있는 튀르키예어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반면 러시아어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다. 아제르바이잔어보다 러시아어가 훨씬 익숙한 나는 의사소통을 대부분 러시아어로 시도했다. 하지만 이곳의 청년들은 종종 내게 ‘혹시 영어는 못 하세요? 제가 러시아어는 잘 못 해서…’라고 역으로 묻고는 했다. 그중 일부는 서유럽 등지 취업을 노리기에 영어를 열심히 배운다고도 말했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영어의 인기는 ‘서양’ 때문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천연자원의 중심지이자, 러시아와 이슬람이 합쳐진 독특한 문화 때문에 바쿠는 이슬람 및 인도 세계와 교류도 무척 활발하다. 아랍인, 파키스탄인, 인도네시아인들이 출장과 여행을 위해 오늘도 바쿠를 찾는다. 영국 석유 엔지니어들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셰익스피어’라는 맥주 펍은 이제 인도인들이 점령(?)해서 간판을 ‘마하라자’라고 바꾸어 달 정도다. 이 무수한 국적의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어와 튀르키예어만으로는 부족했고, 세계 공용어인 영어가 필요했다.
3월에 나는 아제르바이잔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인 이란으로 향했다. 이란 상황은 더욱 흥미로웠다. ‘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최선봉을 자처하는 나라지만, 수도인 테헤란, 심지어 시아파 이슬람 최고 성지 중 하나인 콤에서도 영어에 능숙하고 국제적으로 연결된 사람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단순히 ‘평범한 이란인’들이 ‘체제의 감시’를 피해서 서구 문화를 즐긴다는 상투적 이야기가 아니다. 체제를 지지하는 이란인들과 영어로 이야기할 수 있었고, 나와 비슷하게 생긴 중국인을 마주쳤을 때도 영어를 썼다. 미국의 가장 큰 전략적 경쟁자들이 영어를 쓰며 협력의 길을 닦고 있는 셈이다. 체제를 향한 지지 여부와 관계없이, 외부와 연결되어야 하는 이들에게 영어는 대체 불가능한 언어다.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한국 문화를 즐기는 이란인들을 만났을 때였다. 듣자 하니 ‘82년생 김지영’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같은 한국의 베스트셀러들이 페르시아어로도 번역되어 인기를 끌었다고 했다. 한국에 관심이 많지만 당장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이들은 영어 자막이나 영어 번역본을 통해서 한국 문화를 접한다.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길 때도 정확히 같은 일이 벌어진다.
미국과 유럽의 난민 위기, 무역 전쟁, 러시아의 침공과 중국의 도전이 겹치며 세계화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실제 풍경을 보면, 비서구 국가들 사이의 세계화는 멈춤이 없다. 반대로 세계화를 주도해 온 서구가 세계화에 피로를 느끼고 후퇴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서구 없는 비서구의 세계화’는 역설적으로 서구 문화의 상징인 할리우드, 팝송, 결정적으로 영어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은 서구와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국가들에는 가장 위험한 시기인 동시에 기회의 시기일지도 모른다. 서구가 후퇴하면서 서구적 생활양식을 지키고자 하는 아시아 사회는 크나큰 위기를 느끼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서구의 문법에 익숙한 튀르키예나 한국 같은 아시아 국가들은 서구의 퇴조에 힘입어 대중문화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위기와 기회가 어떻게 다가올지, 더 구체적 그림을 알기 위해서는 아시아 세계화의 현장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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