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포럼] 가열되는 반도체 ‘쩐의 전쟁’
美·中 경쟁에 EU·日·대만도 참전
미국發 보조금 ‘공짜 점심’ 아냐
대체불가 기술력으로 극복해야
골드러시가 한창이던 19세기 말 미국에서는 술 한잔을 시키면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는 식당이 붐을 이뤘다. 공짜 점심을 먹으며 대낮부터 폭음하는 사람이 늘면서 곳곳에서 알코올 중독자가 속출했다. 사회문제로 비화하자 급기야 1896년 뉴욕주에선 ‘공짜점심처벌법’이라는 희한한 법까지 등장했다.
세계 1·2위 경제대국인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최전선에도 반도체가 있다. 미국은 반도체법을 통해 자국 내 첨단 공장 신설 등을 요구하며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뿌리고 있다. 미국 기업인 인텔에는 대출 등을 포함해 최대치인 100억달러(13조원)가 지급될 것이라는 말이 들린다. 삼성전자는 60억달러(8조원), 대만 TSMC는 50억달러(6조6000억원)의 보조금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인텔은 미국 애리조나·오하이오·뉴멕시코 등에 435억달러를 투입한다. 투자액과 비교하거나 자국 기업임을 감안하면 수긍이 갈 만한 보조금 액수다. 하지만 삼성은 의외다. TSMC는 애리조나에 400억달러를 투입한다. 텍사스 오스틴에 반도체 공장을 운영 중인 삼성은 173억달러를 투자해 인근 텍사스주 테일러에 설비를 증설할 계획이다. 미 상무부의 반도체 보조금 기준은 팹(공장)당 최대 30억달러, 프로젝트당 총비용의 15%를 지원받는다. 60억달러는 상한선인 26억달러의 2배다. 파운드리(위탁 생산) 절대강자인 TSMC와 달리 메모리·설계·패키징(후공정) 등 삼성의 턴키(일괄공급)능력이 후한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미국의 보조금은 공짜가 아니다. 중국을 견제하고 반도체 패권의 우위를 점하려는 노림수다. 법에 숨어있는 독소조항도 부담이다. 향후 10년간 중국에서 첨단 생산라인을 5% 이상 늘리면 보조금을 토해내야 한다. 삼성전자 전체 낸드플래시 생산의 40%를 담당하는 시안과 패키징을 맡은 쑤저우 공장 확장이 불투명하다.
미 현지 공장의 초과이익 공유, 회계자료 제출, 수율 등 영업 비밀 제출 요구 등도 난제다. 자국 우선주의를 내건 ‘트럼프 리스크’도 몰려오고 있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의 탁란(托卵)기술로 위기를 극복할지, 아니면 토사구팽당할지 걱정이 앞선다.
작금의 반도체 싸움은 ‘쩐의 전쟁’이다. 미국은 민관이 힘을 모아 ‘팀 USA’를 외친다. 일본은 TSMC의 구마모토 공장에 4760억엔(4조3000억원)을 지원하고 부지 조성·인허가 등을 줄여 건설기간도 2년 단축했다. 제2공장에도 7300억엔(약 6조6000억원)을 투입한다. 유럽연합(EU)도 정부·민간기업이 62조원을 투자해 유럽 내 공급망 구축에 나섰다.
위기감이 커진 우리로서는 초격차 기술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딴판이다. 대기업 ‘특혜 프레임’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복잡한 인허가 절차와 각종 규제도 여전하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가 미·중 갈등에 따른 ‘탈(脫)중국’ 현상이 한국에는 글로벌 기업의 아시아·태평양 허브가 될 기회라는 보고서를 낸 것은 의미심장하다.
선거가 다가오자 여야가 앞다퉈 반도체 관련 공약을 쏟아낸다. 국민의힘은 신규 투자에 대한 보조금 지원 근거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대기업 감세’ 족쇄에 갇혀 있던 더불어민주당도 반도체 기업 투자의 법인세 감면과 세제 지원을 약속했다. 공약(空約)에 그쳐선 안 된다. 정부와 국회, 기업이 머리를 맞대도 ‘K반도체 위기’를 타개하기엔 역부족이다. 당장 연말로 끝나는 반도체 투자 세액 공제 일몰조항부터 해결해야 한다.
김기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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