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엘리베이터 단 반도체’ HBM

곽수근 기자 2024. 3. 20.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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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1854년 뉴욕 산업박람회에서 미국의 엔지니어 엘리샤 오티스가 박람회장에 설치한 대형 엘리베이터에 발을 디뎠다. 그는 자신이 타고 올라간 엘리베이터에 연결된 케이블을 끊게 했다. 그가 개발한 엘리베이터는 줄이 끊어져도 추락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도르래를 이용한 형태로 첫선을 보였지만 안전성 우려에 2000년 넘게 물건 나르는 용도에 머물렀던 엘리베이터가 오티스의 시연을 계기로 사람이 탈 수 있는 기구로 도약했다.

▶챗GPT 같은 생성형 AI(인공지능) 시대가 열리면서 수요가 급증한 HBM(고대역폭 메모리)은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아파트’로 비유된다. 아파트는 수직으로 쌓아올린 D램 칩을 뜻하고, 엘리베이터는 켜켜이 쌓은 D램 내부를 관통하는 전극으로 위아래를 연결한 데이터 전송 통로를 말한다. 기존에는 금속 배선으로 D램을 복잡하게 연결했는데, 수직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어 데이터 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끌어올렸다. 데이터 통로의 폭을 넓혔다는 의미로 ‘도로의 차선’을 대폭 늘린 것에 빗대기도 한다.

▶HBM은 2013년 SK하이닉스가 세계 최초로 개발에 성공하면서 구현됐지만, 상당 기간 주목받지 못했다. 기존 방식의 그래픽 장치용 D램(GDDR)보다 3배 이상 비싸 외면받았다. 경쟁 기업들이 HBM 개발을 접는 속에서도 SK하이닉스는 투자를 이어가 수율(합격품 비율)을 높였고, 지난해엔 D램을 12층으로 쌓아올린 ‘12단 적층 HBM3′를 최초로 내놓았다. 지난해부터 생성형 AI 열풍으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엔비디아에 납품하는 등 투자의 결실을 맺고 있다.

▶초기 판단 미스로 HBM 개발이 뒤늦었던 삼성전자는 그동안 엔비디아의 성능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 고전해왔다. 하지만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19일 기자 간담회에서 “삼성 HBM 제품을 (사용하기 위해) 검증하는 단계”라고 밝히며 일약 주목받게 됐다. 이 발언으로 올 상반기 중 5세대 HBM을 양산할 삼성전자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삼성전자 주가가 급등했다.

▶원래 HBM 개발에 처음 나선 곳은 미국 AMD였지만 이 회사는 SK하이닉스에 손을 내밀어 세계 최초 생산을 돕고도 AI 시대에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약간의 방심에도 주도권이 휙휙 넘어갈 만큼 살벌한 경쟁이 벌어지는 전쟁터다. 젠슨 황은 “앞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엄청난 성장 사이클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두 회사가 AI 시대를 주도하는 엔비디아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길 기대한다.

곽수근 논설위원·테크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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