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의동 칼럼]미국이 우리 편이 아니게 될 때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 담당자들이 최근 내놓는 발언들은 ‘북한 비핵화’ 목표를 폐기하려고 마음먹은 것처럼 들린다. 대북협상을 총괄하는 정 박 국무부 차관보는 “오판이나 우발적 확전 위험을 줄이기 위한 위험 감소를 포함해 제재(완화)나 신뢰 구축, 인도주의적 협력”에 대해 북한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3월18일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 팟캐스트). 미라 랩 후퍼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선임보좌관도 “역내 및 전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면 비핵화를 향한 ‘중간 조치’도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3월5일자 중앙일보). 후퍼가 말하는 ‘중간 조치(interim steps)’는 핵 동결과 군축이다. 북한의 핵무력을 동결시킨 뒤 핵무기 감축을 협상 목표로 삼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열릴 북·미 협상은 ‘비핵화’가 아니라 ‘핵군축’으로 성격이 바뀌게 된다. ‘행동 대 행동’ 방식으로 북한은 핵동결, 미국은 제재 해제를 주고받을 것이다. 이것은 2019년 실패로 끝난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제시한 구상과 똑같다. 북한과의 핵군축 협상 테이블에 미국이 앉게 되면 그 자체로 북한의 핵보유를 묵인하는 의미가 있다. 1990년대 북핵 문제가 불거진 이후 30년간 미국의 스탠스가 일관되게 ‘비핵화’였다는 점에서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중간 조치’라곤 하지만 최종 목표가 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공화당 대선후보 트럼프 진영도 북한의 핵군축에 기울어져 있다. 트럼프 집권 시 국방장관 후보로 거론되는 크리스토퍼 밀러(전 국방장관 직무대행)는 핵군축 협상에 대해 “왜 안 되느냐(Why not)는 의견에 찬성하는 편”이라고 했다(3월18일자 동아일보).
미국이 진영을 가리지 않고 ‘북핵 현실주의’로 수렴하고 있는 까닭은 우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이어 동북아시아까지 불안정성이 커지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국의 미·중 전략경쟁과 관련지어 볼 여지도 있다. 북·미 군축협상 기간에 북한은 미·중 경쟁에서 ‘완충지대’의 포지셔닝을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협상이 궤도에 올라 일정 수준의 핵군축 프로세스가 달성되는 데만 최소 수년이 걸릴 것이고, 북한은 적어도 이 기간 중 미·중 사이에서 중립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미국에 불리한 그림이 아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이완된 대북 태도는 북한과 물밑교섭 중인 일본에 기회다. 대북제재의 빗장이 헐거워진다면 북·일 간 ‘주고받기’ 교섭에 탄력이 붙게 된다. 월드컵 남자축구대표팀이 예선을 위해 도쿄와 평양을 오가는 요즘의 북·일관계는 2018년 한반도 평화 국면 초기를 떠올리게 한다. 일본인 납치문제 해결 방안을 담은 ‘북·일 스톡홀름 합의’ 10주년인 오는 5월을 전후로 모종의 합의가 도출될 가능성도 있다. 이대로 가다간 일본이 미국을 대리해 동북아 외교의 주도권을 쥐고 한반도를 관리하는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북한을 둘러싸고 한국과 미·일 간에 ‘탈동조화’가 본격화되면 대북 강경 일변도인 한국은 왕따 신세가 된다. 북한의 위협을 미·일 편중 외교의 명분으로 삼았던 윤석열 정부로선 ‘게도 구럭도 다 놓칠’ 판이다.
미국의 대북 태도 변화는 일시적이 아니라 기조적 전환에 가깝다. 지난 30년간 국제사회를 지배한 미국 단일 패권 체제는 쇠퇴일로에 접어들었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승리주의에 젖어서 ‘자유패권(liberal hegemony) 전략’을 세워 과잉팽창에 나섰던 미국은 이라크·아프간 전쟁 실패, 2008년 금융위기라는 더블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 패권질서의 균열을 재촉하고 있다. <30년의 위기>를 쓴 차태서 성균관대 교수는 지금의 세계를 ‘안정적 패권국이 부재한 대공위기(大空位期)’로 본다. 십자군 원정 벌이듯 전체주의 국가들을 ‘민주화’하겠다는 독선이 좌절하면서 북한에 대한 미국 시선도 달라진 것이다.
이런 가운데 가치외교를 내세우며 세계를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로 가르고 있는 바이든은 ‘조직원들을 규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노쇠한 보스’처럼 보인다. 대열에서 이탈자들이 속출하고 있지만, 윤석열 정부는 맨 앞줄에서 ‘돌격 앞으로’를 외치고 있다. 선 넘는 오버액션으로 30년간 우정을 쌓은 북방국가들과도 척을 졌다. 행동대장은 상황이 바뀌면 가장 큰 낭패를 보는데 한국이 그 처지가 될 판이다. 한·미 동맹 맹목주의에 마비된 외교적 자아(自我)를 되찾아 현실주의적 대북 접근을 모색해야 한다.
서의동 논설실장 phil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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