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공룡 발아래 잠든 숲속의 공주

기자 2024. 3. 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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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지칭개와 꽃다지가 일제히 솟구치는 걸 보면 말이다. 봄날 낮 시간은 점점 길어질 것이다. 반대로 밤은 짧아진다. 자고 깨는 시간을 관장하는 일주기 시계가 빛의 장단에 맞춰졌다면 인간은 겨울보다 여름에 좀 적게 자도 괜찮을까?

불규칙한 수면 유형을 보인 환자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답은 ‘그렇다’이다. 독일 베를린 수면클리닉 연구 책임자인 디터 쿤츠는 188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수면 시간을 조사했다. 참가자들은 6월보다 12월에 잠을 한 시간 더 잤다. 먹고 싸고 자는 인간의 여러 생리 현상이 어둠과 빛 리듬에 따라 진화해, 겨울 아침 일찍 일어나 밖이 어둑하면 우리 뇌는 ‘어두워서 할 일이 없으니 굳이 이불 밖으로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수면 문제가 없는 사람도 봄이 한창인 4, 5월에 적게 자고 겨울에 30분 넘게 더 자는 걸 보면 수면 시간에 계절성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동물들은 다 잠을 잔다. 닭은 횃대에 서서 자고 뇌를 번갈아 가며 절반씩 쓰는 돌고래는 헤엄치면서 잔다. 잘 때 동물의 뇌는 활동을 멈추고 그에 따라 움직임도 둔해져 주변 환경에 잽싸게 반응하지 못한다. 동물에 따라 특정한 장소나 자세를 고집하며 잠을 자는 모습도 흔히 관찰된다. 떠매 가도 모를 만큼 곯아떨어지기도 하지만 인기척을 느끼면 눈을 감은 채로 귀를 쫑긋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잠을 규정하는 특성은 뇌 활동에 전기적 변화가 생긴다는 점이다.

수면 유형에는 꿈꾸고 심박수도 늘어 가장 활동적인 급속안구운동(REM) 수면이 있는가 하면 비렘수면도 있다. 그중에서도 뇌파가 느린 서파(徐波) 수면을 하는 동안 인체는 낮에 다친 여러 조직을 복구하고 면역계를 강화하며 장기 기억을 통합하는 데다 새로 습득한 정보를 처리한다. 잠을 깊이 자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까닭이다. 과학자들은 거북이 같은 파충류에서는 렘수면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조류와 포유류에서는 뚜렷한 렘수면을 관찰했다. 뇌파를 검사해서 내린 결론이다. 동물 계통이 나뉘는 동안 렘수면이 새로 진화한 까닭이다. 과학계는 다른 계통의 파충류에서 조류와 포유류가 진화한 까닭에 렘수면도 두 집단에서 독립적으로 진화했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렘수면은 왜 진화했을까? 무엇보다 렘수면은 뇌 발달에 필수적이다. 신생아가 렘수면에 80% 넘는 시간을 투자하는 현상이 그 증거다. 하지만 렘수면 시간은 어른이 되면 25% 안팎까지 떨어진다. 뇌가 미숙하게 태어난 인류에게 렘수면은 특히 중요한 특성이지만 뇌가 다 자라서도 여전히 필요한 걸 보면 뇌 인지 기능을 유지하는데도 렘수면이 어떤 역할을 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부터 동굴처럼 어둡고 안전한 곳에서 등을 땅에 대고 꿈꾸며 자게 되었을까? 스페인의 신경생리학자 루벤 리알은 공룡을 피해 땅굴을 파고 잠을 자던 데서 인류 조상인 포유동물의 수면 형태가 비롯됐다고 추정한다. 낮에 땅 위에서 거대한 공룡 발에 깔리지 않도록 초기 포유류는 어쩔 수 없이 야행성을 터득했다. 리알은 이를 ‘야행성 진화 병목’이라고 불렀다. 공룡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밤 생활에 적합한 몇 가지 유전 형질을 갖춘 일부 포유류만이 생존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작은 포유동물은 피부를 털로 빼곡히 채우고 젖으로 새끼 배를 채우면서 밤의 세계를 근근이 살아갔다. 상대적으로 추운 밤에 움직이느라 항온성을 진화시킨 전략은 나중에 포유동물에게 요긴해졌다. 그렇게 포유류는 어두운 동굴 안에서 일억년 넘게 잠을 잤다. 눈 감는 습성도 이때 생겼다. 앞을 보지 않아야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대뇌피질 절반을 쉬게 할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소행성이 지구 표면을 강타하고 화산이 터지기 시작했다. 백악기 대멸종이 시작된 것이다. 공룡이 사라져 텅 빈 세상은 포유류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털과 젖샘에 정온성으로 무장한 면역계를 앞세운 포유동물은 생물 분해 곰팡이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자신의 입지를 서서히 넓혀갔다. 생명체를 분해하는 대멸종 시기 곰팡이가 침범하기에 포유류 몸은 너무 뜨거운 곳이었다. 마침내 포유류 시대가 열렸다.

마녀가 호시탐탐 넘보는 잠든 숲속 소녀의 운명처럼 잠은 본디 위태로운 법이다. 그래도 우리는 매일 잔다. 꽤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깊이 자야 상처와 면역계, 체온 항상성이 회복된다. 그러니 어둡게 자고 푸른 하늘 아래 기지개를 켜자.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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