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1565년 유생 상소와 야당 공천투표

기자 2024. 3. 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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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5년 4월, 20년간 최고권력을 행사했던 문정왕후가 사망했다. 그 직후 시작되어 그해 10월까지 이어진 지방 유생들의 전국적 상소는 조선의 정치 및 언론 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 양상은 작금의 한국 정치 및 언론 상황에 기시감을 준다.

조선은 고려 말 토지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건국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정치는 처음부터 공적 이념성을 강하게 띠었다. 이것은 현실 권력 못지않게 ‘공론(公論)’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조정에서 공론을 담당하는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을 통칭하는 언관(言官)이 존중되었다. 그런데 언관이 처음부터 실제로 강력한 발언권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시작했어도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실제로 구현되지는 않았던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선의 공론 중시 지향은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성종대(1457~1494)에 언관이 공론을 담당하는 주체로 확립되었고 조정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했다. 조선이 건국되고 대략 세 번째 세대가 등장할 무렵이다.

조선왕조의 공론 중시 경향은 언관 권한 강화에 그치지 않았다. ‘공론이 있는 곳’, <조선왕조실록> 표현으로 “공론소재(公論所在)”는 더 아래로 확산되었다. 이는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중단시키고 시작된 중종대(1506~1544)에 분명해졌다. 중종대에 공론이 더욱 중시되고, 공론에 참여하는 모집단이 확대되었다. 그 핵심은 성균관 유생이었다. 성균관 유생은 주로 문과 급제 이전의 10대 후반~20대의 젊은이었다. 건국 당시에는 누구도 그들에게 국정을 논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종대에 그 인식이 달라졌다. 오히려 아무 이해관계가 없기에 바른말 하는 존재가 성균관 유생이라는 생각이 일반화되었다. 중종 말년에는 성균관 유생의 ‘공론’이 언관의 언론과 다름없다고 생각되었다.

문정왕후 사망 직후 전개된 상황은 지방 유생들이 새롭게 공론 형성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정왕후 사망 직후부터 지방 유생의 상소가 조정에 쇄도했다. 모두 문정왕후의 불교 진흥에 큰 역할을 한 보우를 죽이라는 내용이었다. 조정의 언관이 유생과 연대하여 공론을 형성했다. 명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성균관 유생들이 성균관을 나와버리는 ‘공관(空館)’으로 맞섰다. 당황한 명종이 성균관에 돌아올 것, 즉 ‘취관(就館)’을 수십차례나 종용했지만 그들은 전혀 듣지 않았다. 결국 명종은 보우를 제주로 유배보내야 했다.

지방 유생의 전국적 상소운동과 짝하여 조정에서는 문정왕후 친동생인 영의정 윤원형에 대한 탄핵이 시작되었다. 결국 명종이 이에 굴복해서 영의정을 바꾼다. 그리고 1565년이 가기 전에 보우와 윤원형은 살해되거나 자살했다. 이로써 수십년 이어진 정치세력이 몰락하고 사림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다. 말하자면 유생들의 조직적 상소운동이 조선 정치의 주도 세력 교체에 동력을 제공한 셈이다. 이로써 지방 유생들은 언관, 성균관 유생과 함께 공론 형성층 지위를 인정받게 된다. 이렇게 확립된 지방 유생들의 정치적 지위가 조선 후기에 ‘영남만인소’를 가능하게 했다. 지방에 있는 모든 유생들도 국정에 대해 발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여야가 공천을 거의 완료했다. 그런데 유독 제1야당의 공천을 두고 논란이 많다. 현역 의원이 대거 탈락하고 신인이 공천을 받기도 하고, 다선 의원이 낙천에 반발하여 탈당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1야당 당원과 시민들 투표의 결과이다. 기성 정치권과 언론은 이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평한다. 하지만 이것이 20일 뒤 선거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시민과 당원에 의한 직접민주주의의 경향은 2017년 ‘촛불집회’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촛불’ 이후에 낀 거품을 제거하고 국정의 일탈을 바로잡으라는 요구인 것 같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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