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문발차 의료개혁이 지속가능하려면 [뉴스룸에서]
이정훈 | 사회정책부장
윤석열 대통령은 연금 개혁을 3대 개혁 과제 중 하나로 꼽았다. 2023년은 물론 2024년 신년사에서도 연금을 노동·교육과 함께 3대 개혁 과제로 제시했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1998년 9%로 오른 뒤 20년 넘게 묶여 있다. 그동안 어떤 정부도 손을 대지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 역시 말의 강도와 달리 행동은 소극적이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10월 ‘세대별 보험료율 차등 인상’이라는 방향성만 담은 연금 개혁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가입자가 ‘더 내도록 하자’면서도 구체적인 숫자는 없었다. “공론화를 통해 구체화하겠다”고만 했다. 국회에 ‘던지기’를 한 꼴이다.
3대 개혁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새해부터 정부가 내세운 의료 개혁은 숫자가 분명했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2월 긴급 브리핑을 열어 2025년부터 5년간 의대생을 매년 2천명씩 늘리겠다고 했다. 대한의사협회와 1년여간 28차례에 걸쳐 대화를 했지만 의협은 ‘증원 불가’ 입장만 내세웠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2006년부터 3058명으로 19년간 동결된 의대 정원이 내년엔 5058명으로 65%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2천명 증원은 되고 1천명 혹은 3천명은 왜 안 되는지 정부 설명으론 알 길이 없다. 정부가 제시하는 ‘2천명 증원’ 근거는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서울대 의대 등에서 작성한 보고서가 사실상 유일하다. 정작 보고서 저자들은 2천명이 아니라 “10년간 1천명씩”(신영석 보건사회연구원 명예연구위원) 등 정부와는 다른 주장을 펼쳤다.
전공의 집단행동과 의과대 교수들의 사직서 제출 결의 등으로 대표되는 의사들의 ‘집단 이기주의’와, 환자를 인질 삼은 ‘생떼’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정부의 부실한 근거와 ‘많을수록 좋다’는 단순 논리로는 의사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여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기엔 역부족이다. 70%대(한국갤럽 2월 셋째 주 조사) 찬성 여론도 ‘정부안대로 추진’과 ‘규모·시기 조정’이 각각 47%, 41%(3월 둘째 주)로 갈린다. 애초 정부는 ‘증원 거부’를 내세운 의협 태도만을 꼬집을 것이 아니라, 스물여덟차례 열린 논의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 국민을 설득해야 했다.
2천명 증원 결정이 ‘깜깜이’다 보니 그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늘리려는 의대 정원 2천명을 비수도권에 82%(1639명), 수도권에 18%(361명)를 배정했다. 증원은 지역거점 국립대와 입학 정원 40명 수준인 소규모 의대에 집중됐다. 그러나 정원 관련 배정위원회에 누가 참여했는지, 또 실사도 없이 어떤 기준에 따라 학교별 증원 규모를 결정했는지 등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다. 의사 인원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공공의료·지역의료 강화라는 숙제가 남아 있다.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3분 진료’ 등 의료체계의 문제점은 증원만으론 해결할 수 없다. 의사가 2천명 더 배출되는 것은 2031년부터이고, 이들이 전문의로 성장할 때까지 3~4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미래를 위한 대책만 제시했을 뿐,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지금에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의대 쏠림 현상도 풀어야 할 과제다. 30대 대기업 대리부터 50대 증권사 간부까지 너나없이 의대 입시 학원 문을 두드리는 판이다. 서울대 공대에 입학해도 의대를 가려고 반수하는 학생들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증원은 ‘의대 열풍’을 부채질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의사가 된 개인은 성공하더라도, 다양한 인재가 부족해진 국가는 발전하기 힘들다.
오는 4월 시민 500명이 국민연금 개혁 방안을 두고 네차례 공개 토론을 한다. ‘더 내고 더 받는 안’(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50%), ‘더 내고 그대로 받는 안’(12%, 40%)을 두고 논의한다. 정부가 비워놓은 숫자를 국회 연금특별위원회가 꾸린 의제숙의단이 2박3일간 합숙을 통해 채운 안이다. 시민들이 토론하는 장면은 공중파 방송을 통해 생중계된다.
같은 달 대통령 직속으로 의료개혁특별위원회도 출범한다. 지역의사제, 지역의료기금, 비급여 제도 개선 등 필수·지역 의료 강화 방안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증원과 의료체계 개편 방안 마련의 선후가 바뀌었지만, 이제라도 투명하게 논의를 공개해 여론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개문발차로 시작한 ‘의료 개혁’이 지속가능할 수 있다.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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