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 평균수명이 16살이었던 나라
다리가 말을 건다. 이제 더 속도를 내봐. 심장은 속삭인다. 나중을 생각해서 지금은 참을 때야. 코끝이 찡하다. 등에 내려앉은 꽃샘추위를 따라 으스스한 기운의 발걸음 소리가 계속 쫓아온다. 올 첫 대회는 3·1절을 기념하는 마라톤 대회다. 하프를 신청하고 설렘 반, 후회 반으로 훈련 삼아 중랑천을 달렸다. 눈길도 있었잖아, 의정부 넘어 30㎞도 달려봤잖아. 한강을 따라 햇빛이 반짝이는 동안 겨우 등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방금 겨울을 따라잡았다.
육체를 단련하고 시간과 가까워져야 가능한 완주
달리기에 고맙다고 말한다. 나는 늘 내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몰랐고, 업무를 앞에 두고 첫 직장의 무단결근처럼 지레 포기할까봐 겁났다. 달리기는 단순한 반복이다. 특별하지 않다. 몇 시간이고 발을 교차해서 내딛고 팔을 계속 흔들면 된다. 달리기는 축적이다. 오늘이 내게로 와서 어제로 사라지지 않는다. 1m가 쌓여 10㎞가 되듯, 오늘과 오늘이 쌓여 결과를 이룬다. 단순한 반복은 사람을 외롭게 하지만 외로움은 존재를 자각하게 하고 기존 문법을 벗어날 힘을 준다. 끝내 다다를 수 있다는 믿음을 달리기에서 얻는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거나 흥미진진 재미있는 영상을 보며 보내는 30분은 짧다. 시간이 언제 왔다 갔는지 못 느낀다. 눈꺼풀 아래 졸음으로 붙어 있어 직접 볼 수 없다. 러닝머신 위의 30분은 무척 길다. 고통으로 시작해 지루함으로 이어지다가 역설적이게도 1초, 1초를 지각하게 된다. 시간이 거리로 전환되면 형체를 이룬 느낌이다. 30분과 하이파이브를 나눌 수 있다. 조악하게나마 시간과의 상호작용을 경험한다.
10㎞를 조금 넘게 달렸다. 길은 응원한다. 오른쪽 발목이 시큰한 건 불암산을 달리며 접질렸던 탓이다. 3월을 올려다본다. 바람이 채근한다. 힘을 내본다. 왼쪽 운동화 끈이 발등을 누른다. 의욕만 앞세우다가 마음이 먼저 지칠 때가 있다. 지레 걱정으로 마음을 단단히 묶으려다가 그만 운동화 끈을 지나치게 조였다. 잠시 멈춘다. 물 한 잔을 마시고 마음도 끈도 느슨하게 묶어둔다. 이제 겨우 반환점을 돌았다. 속도를 늦추는 건 괜찮다. 오랜 달리기를 위해 그만 달려도 좋은 날도 있다.
장거리달리기는 시간과 친해지는 일이다. 마라톤 2시간 벽에 도전했던 엘리우드 킵초게와 같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선수도 어김없이 견뎌야 하는 시간이 있다. 케냐의 선수들이 매일 아침 천천히 고지대를 달리며 시간을 몸에 깊이 새기는 장면을 본다. 보통 경험이 쌓인 러너는 3시간 이내, 일반 러너는 4시간 이내의 42.195㎞ 완주를 꿈꾼다. 아주 초보라도 완주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대회는 5시간 이내를 완주로 인정하는데, 1㎞를 대략 7분에 달리면 된다. 여린 심장이 능히 버틸 수 있는 속도다. 물론 그것도 쉽지 않다. 다만 육체의 단련 이상으로 시간과 가까워져야 한다. 한순간에 지옥으로부터 낙원에 도달할 수는 없다. 오버페이스를 경계해야 한다. 지루함은 지친 다리보다 못하고, 조급함은 제한시간을 넘긴 쓸쓸한 완주만 못하다.
처음 20㎞를 달린 도시
한 시간을 온전히 달리기까지 오랜 날이 필요했다. 중랑천 백로나 원앙 때문이라고, 구름에 감싸인 도봉산 선인봉 때문이라고, 멈춰서는 데도 갖가지 이유를 붙였다. 싸구려 운동화는 못 신겠다는 핑계는 웃고 넘어갈 만했다. 시계의 지피에스(GPS)가 정확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참으로 가련했다. 결국 10㎞를 쉬지 않고 달리는 수준에 이른 것은 시간이 마음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400까지 숫자를 세거나 노래 한 곡 반 혹은 두 곡이 끝나면 1㎞가 지난다. 멀리 수락산 정상을 바라보며 달리면 세상이 느리게 지나가는 듯 시간이 리듬을 맞춰줬다. ‘50K, 100K 트레일러닝대회’가 두렵지만 내년까지는 모두 경험해보려 한다. 쉬고, 걷고, 먹고, 마시고, 마치 일상의 시간을 산과 들로 옮겨놓은 것처럼 나만의 시간을 지구의 시간에 보태놓고 싶다.
처음 20㎞를 달린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2019년 3월 순방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였다. 순방지에서 꼭 달리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점점 늘어갔는데, 처음에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든지 긴장을 유지한다든지 그럴싸한 이유를 들었다. 그러다가 습관처럼 달렸고, 달리기 시작했으니 마저 달리자 해서 달렸고, 나중에는 함께 달리자는 이들이 생겨 달렸다. 2017년 11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는 차도뿐이어서, 2018년 11월 파푸아뉴기니 포트모르즈비에서는 아예 호텔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달리지 못했다. 원시 부족이 외지인을 납치하는 일이 지금도 종종 벌어진다. 두 도시를 제외한 모든 나라 모든 도시 서른여덟 곳을 달렸고, 미국 워싱턴디시(D.C.)의 링컨기념관과 뉴욕 센트럴파크의 달리기 횟수는 두 손가락으로도 부족할 듯하다. 평창 겨울올림픽의 성공, 한반도 비핵화, 경제동맹을 위해 미국과 유엔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두 도시에 모두 여덟 번 방문했다.
프놈펜에 가면 꼭 킬링필드 유적지에 가보고 싶었다. 언제 어떻게 보게 됐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킬링필드>의 학살 장면이 대통령 순방 연설문을 준비하는 동안 생생하게 살아났다. 안경을 썼다고, 악기를 들었다고 죽음에 이르렀다. 묘한 기시감 때문에 부르르 떨었다. 1976년부터 3년 반, 크메르루주의 폴 포트는 150만 명 넘는 국민을 학살한다. 반대 세력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설계한 이상사회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이성의 끔찍한 배신이었다.
수없는 죽음이 누웠던 구덩이
호텔에 도착해 구글 지도를 켜고 거리를 보니 9㎞다. 이제까지 순방지에서의 달리기는 10㎞를 넘지 않았다.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새벽 6시에 출발해도 오전 8시부터는 업무 대기상태가 될 수 있었다. 왕복 18㎞라면, 시간을 얼마나 잡아야 할지 걱정이다. 체력이 허락할지도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컴컴해, 위험할 거야, 그냥 쉬어, 갖은 목소리가 피곤하게 들리기도 한다. 명백히 죽음으로 향한 길, 세상에 나서 가장 느리게 걷고 싶은 길, 영원히 도착하고 싶지 않았을 길, 그 길을 꼭 달려봐야지. 격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새벽 4시 반, 어두운 길 속으로 과감히 들어간다. 사람들이 줄줄이 묶여 끌려가고 있다.
여기저기 쓰레기를 태운다. 배고픈 개들이 마구 짖는다. 날이 밝아오는데, 행렬은 비극적인 속도로 킬링필드에 멈춘다. 이른 시간인데도 웃통을 벗은 안내인이 있다. 택시를 타게 될지 몰라 넣어둔 30달러의 절반을 건넨다. 죽음이 어처구니없이 누웠던 구덩이가 셀 수 없이 많다. 아이를 내동댕이쳤던 죽음의 나무에는 알록달록 팔찌들이 죄 없는 눈빛처럼 매달렸다. 한때는 뙤약볕 아래서 땀 흘리는 피부를 가졌을 해골들, 흙길을 달리며 먼지에 뒤덮인 피부를 가졌을 다리뼈들, 유토피아의 다른 말은 자기 과신 혹은 증오다. 인간은 진정 기가 막힌 싸움터다.
돌아오는 길은 자주 걸었다. 살아남은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눈다. 아침은 부산하다. 차들과 오토바이들로, 일찍 일어난 사람들과 시장의 물건들로 캄보디아가 깨어나 있다. ‘35살 이하 젊은 세대가 인구 70%를 넘는 캄보디아의 역동성을 볼 수 있었다’라고 쓴 구절이 기억난다. 킬링필드 이후 평균수명이 16살까지 떨어졌던 1970년대 말의 캄보디아가 만든 오늘이다. 소름이 돋는다. 따뜻한 봄이 바스러진 것만 같다.
시간과 친해지면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된다. 아무리 킵초게라도 마라톤 풀코스를 1시간에 달릴 수 없고, 나는 완주를 위해 애초부터 어떻게든 4시간 가까이 달릴 각오를 해야 한다. 너무 덥거나, 맞바람이 거세거나, 언덕이 많은 코스라면 당연히 더 넉넉하게 시간을 잡아야 한다. 인내심 역시 커진다. 단순한 반복, 일상의 소중함을 안다. 나를 넘어서는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역사의 시간과 친해지면 시대의 한계를 알게 된다. 당대에 모든 일을 이룰 수는 없다. 이뤄지지도 않는다. 시대가 불행하지 않다. 어떤 나라는 2시간대에 민주주의가 이뤄지겠지만, 어떤 나라는 4시간대, 심지어 이번에 민주주의가 완주하지 못할 수도 있다. 첫걸음부터 차곡차곡 쌓아가지 않은 민주주의란 없다. 결과에 대한 조급함이 과정에서의 정의를 잃게 한다. 선한 의지가 폭력으로 변질한다. 빅토르 위고는 “책임의 부재가 혁명의 진정한 모습”이라 한다. 틀리지 않는다. 내가, 내 시대에,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오만이야말로 공포요 무책임이다. 반환점을 돌지 않고 도착할 수 있는 결승점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내가 내 시대에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오만
멀리 골인 지점이 보인다. 앞사람만 보고 달리던 시야가 열린다. 남은 힘을 쏟아낸다. 오늘 아침 달리기 위해 일어난 사람 몇몇을 추월한다. 달리기 위해 아침을 먹은 또 몇몇이 나를 추월해 간다. 점점 가까이, 이제 멈춘다. 1시간54분56초를 기록한다. 나를 도닥인다. 줄을 서서 완주 메달을 받고, 맡겨놓은 짐을 찾아 외투를 입는다. 모든 승패의 대단원은 늘 평범하다. 겸손해진다. 아무렇지도 않은 3월이 돌아온다. 오랜 시간 서 있던 한 그루 나무 옆에.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연재를 시작하며: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58번의 순방으로 40개 나라를 방문했다. 신동호 시인은 연설비서관으로 참모들 가운데 유일하게 모든 순방 일정을 보좌했고, 새벽 시간을 활용해 낯선 나라를 달렸다. 그때 보고 느낀 감정은 문 전 대통령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떠나며’ 시리즈에 고스란히 담기기도 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시인의 달리기에 대한 생각과 함께 묵혀놓았던 순방지의 새벽 이야기들을 4주마다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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