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의대 정원 확대만이 정답일까?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하는 정부와 이를 반대하는 의사 집단의 힘겨루기가 계속되고 있어서 국민의 피로감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전공의 사직뿐만 아니라, 의대 교수들까지도 사직하겠다고 결의하면서 대한민국의 의료 대란은 점차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 싸움의 가장 큰 피해자는 정부나 의사가 아니고, 죽음의 문턱에 있는 응급 환자들이다. 중증 환자를 곁에 두고 있는 가족들은 좌불안석 속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대다수의 국민들은 의대 정원 확대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것으로 보이며, 여론에 민감한 정치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의대 정원 확대를 지지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국민이 원하는 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면서 애꿎은 국민만 피해를 보고 있다. 이 사태가 장기화되면 국민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 뻔하다. 과연 의대 정원의 확대는 국민의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내야만 하는 필수 불가결한 것일까?
선진 복지국가라면 국민의 생명 보호와 건강 증진을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숙련된 의사가 점차 많아지고 국민이 저비용으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꿈꾸는 복지국가로 가는 바람직한 방향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바람직한 방향이라도 국가가 어떤 정책을 펼칠 때는 앞뒤 좌우를 살펴 심각한 부작용은 없는지 꼼꼼히 따져가며 균형 있게 추진해야 한다.
만일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의대 정원이 확대된다면 의사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게 되고 국민은 좀 더 다양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세상사가 무엇이든 많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의대 정원의 급격한 확대는 의대 교육의 질적 저하로 이어져 실력 없는 의사가 양산되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정부나 의사 편이 아닌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의대 정원 확대가 가져올 수 있는 또 다른 심각한 부작용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의대 정원을 급격히 확대할 때 예상되는 가장 큰 부작용으로 나는 국가 인력 구성의 불균형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지금의 입시체계에서도 의대는 자연계 우수 인재들의 블랙홀이라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자녀들의 의대 진학을 원하는 부모들은 초등학교 이전부터 사교육에 매달리고 있으며, 대학에 입학한 우수한 이공계 신입생 중에서도 많은 수의 학생들이 의대를 목표로 재수하기 위해 휴학을 하거나 자퇴하고 있다. 지금도 이렇게 문제가 많은데 앞으로 의대 정원이 확대된다면 이러한 문제점은 훨씬 더 심각해질 것이다.
현시점에서 정부와 국민이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대한민국에는 우수한 의사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에는 좋은 의사도 물론 필요하지만 우수한 과학자, 전자공학자, 기계공학자, 그리고 AI 전문가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인재들 대다수는 전국에 있는 3000여명의 의대 정원을 다 채우고 나서야 다른 이공계열 학과를 지원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의과대학 우선 지원 현상은 대한민국을 의대 위주의 불균형 국가로 만들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저출생으로 인한 학령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인재 불균형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불균형 문제의 해결책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의대 정원을 2000명이나 증원하게 되면 대한민국 인재 구성의 불균형은 국가 재앙 수준의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과거를 한번 돌아보자. 2000년대 이전에는 대한민국의 인재들이 의과대학뿐만 아니라 전자공학, 화학공학, 물리학 등 자연계의 다양한 학문 분야에도 균형을 가지고 진학했다. 그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을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 결과 우리는 반도체, 자동차, 조선, 화학공학, 생명공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세계적인 기업들을 보유한 과학기술 경쟁력 세계 10위권의 선진국가가 되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로운 대한민국은 우수한 과학기술 인력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은 중국, 대만과 같은 후발 국가들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이공계의 우수 인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삼성이나 현대자동차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들도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좋은 인재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지난 20여년 동안 인재들의 집중적인 의대 지원 경향이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갉아먹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 정부는 연구자들을 카르텔로 규정하면서 과학기술 분야 연구비를 대폭 삭감하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 결과 한국의 과학자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고, 일부 연구자들은 해외로 빠져나갈 길을 찾고 있다. 이렇게 과학기술자들이 홀대받는 한국에서 과연 어떤 학생들이 앞으로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꿀 수 있겠는가?
이런 현실을 바라볼 때, 앞으로 의대 정원을 2000명 더 증원한다면 의대를 제외한 이공계 분야에서 인재들은 씨가 마르게 될 것이 자명하다. 이렇게 되면 대한민국은 현재의 불균형을 넘어서 과학기술이 쪼그라든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이고 국가 경쟁력은 급속히 추락하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런 심각한 부작용이 있음을 알면서도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하고 싶은가? 국가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정부라면 지금 땅에 떨어져 있는 과학자들의 자부심을 먼저 일으켜 세운 다음에나 생각해 보라.
일찍이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의 희망찬 미래를 꿈꾸면서 KIST, 과학원을 세워 과학기술 인재들을 키워냈고, 대덕 연구단지를 만들어 연구자들을 지원했다. 그런데 현 정부는 과학기술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박정희 대통령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부의 정책 입안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질문한다. “대한민국을 의사 위주의 기형적인 국가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우수한 의사와 우수한 과학자들이 균형을 갖춘 미래가 있는 국가로 만들 것인가?”
김익환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ihkkim@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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