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뿜은' AI 반도체 전쟁 … 韓은 최후승자 될 준비됐나
◆ 매경 명예기자 리포트 ◆
글로벌 반도체 산업이 생성형 인공지능(AI) 시장의 급속한 확대와 함께 격변기를 맞고 있다. 엔비디아가 AI 반도체의 절대 강자로 꼽히는 가운데 생성형 AI 붐을 일으킨 챗GPT를 선보인 오픈AI도 AI칩 개발에 뛰어들기 위해 파트너를 찾고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AI 반도체를 개발하는 '이자나기(Izanagi)' 프로젝트로 1000억달러(약 133조원) 규모의 투자를 예고했고, 구글·메타 등 글로벌 빅테크도 앞다퉈 AI칩 개발에 뛰어들었다. AI가 촉발한 시장 격변은 미국·일본·유럽연합(EU) 등 정부가 예고한 대규모 보조금과 맞물리면서 변화의 진폭을 키우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글로벌 반도체 산업 격변기에 한국 반도체 산업이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시장 변화를 이끄는 주요 요인들을 살펴봐야 한다.
우선 AI 반도체가 '게임 체인저'로서 시장의 전환을 이끌고 있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AI 시대에는 반도체가 핵심이며, AI 활용이 시작 단계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CEO)는 2027년까지 AI 산업이 4000억달러(약 535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AI 산업의 확대는 반도체 산업 수요 확대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AI는 챗GPT처럼 서버에서 활용도가 늘어나는 데 그치지 않고 삼성 갤럭시 S24와 같은 '에지 디바이스'에서의 활용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제조업뿐 아니라 유통·서비스 등 산업 전반으로 AI 활용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AI 시대로 접어들며 반도체 산업은 더 빠른 속도의 기술 혁신을 요구받게 됐다. 이에 따라 반도체 패키징의 중요성도 강조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의 차세대 기술 개발, 파운드리 분야에서의 해외 주요 수요처 확보처럼 전방위적인 시장 대응이 필요하다. 이를 둘러싼 반도체 기업 간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질 것이며, 이 경쟁의 결과는 차세대 산업 판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반도체 시장 판도를 바꾸는 또 하나의 축은 세계 각국의 전례 없는 보조금 지원이다. 최근 1~3년 새 각국 정부가 내놓은 반도체 산업 지원책이 이제 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2022년 자국 반도체 생태계 재건을 위해 총예산 527억달러의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제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인텔과 TSMC의 생산시설을 자국 내에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까지 미국에 투자 의향을 밝힌 기업만 600개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역시 지난 3년간 4조엔(약 36조원) 규모의 파격적인 반도체 지원 기금을 마련해 반도체 제조시설 구축에 1조8000억엔(약 16조원)을 지원하며 투자를 유치했다. 특히 TSMC는 1공장(4조3000억원), 2공장(6조5000억원) 건립으로 보조금을 받는다. 1공장은 착공 후 불과 22개월 만에 가동해 화제를 모았다. 설비투자 세액공제가 없던 일본은 최근 세제 개편안에 반도체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전략물자 생산 기반 세제' 신설 방안을 담아 현재 의회에서 검토하고 있다. EU는 2030년까지 430억유로(약 62조원)의 민관 투자를 목표로 하는 유럽 반도체지원법(European Chips Act)을 지난해 통과시켰다. 중국은 2차에 걸친 63조원 규모의 국가 펀드 조성으로 반도체 공급망 국산화에 사활을 걸고 있다. 최근에는 35조원 규모의 3차 펀드 조성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우리와 같이 반도체 제조 강국인 대만은 기업에 첨단 설비투자의 5%를 세액공제해 주는 법안을 통과시키며 TSMC의 자국 투자 확대를 뒷받침하고 있다.
반도체 시장은 2022년 하반기부터 이어졌던 불황 터널에서 빠져나올 기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와 달리 올해에는 D램·낸드플래시 가격 상승에 힘입어 흑자로 전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흘러나온다.
시장조사기관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D램 가격은 최근까지 상승했다. D램 PC용 범용 제품(DDR4 8Gb) 고정거래가격은 지난해 9월부터 5개월간 38.5% 올랐다. 낸드플래시 가격도 5개월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 범용 제품(128Gb 16Gx8 MLC) 평균 고정거래가격은 4.9달러로 전월보다 3.8% 올랐다. 전년 동기와 비교하면 낸드플래시 가격은 18.4%나 상승했다.
반도체 수출에도 청신호가 켜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2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반도체 수출액은 99억5000만달러에 달했다. 전년 동기와 비교하면 66.7% 늘어난 수치다. 품목별로는 메모리 반도체(60억1000만달러)가 108.1% 증가했다. 시스템 반도체 수출액도 27.2% 늘어난 34억2000만달러를 기록했다.이달 초에도 반도체 수출은 호조세를 이어갔다. 관세청에 따르면 3월 1~10일 수출액은 135억4000만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13.4% 줄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반도체 수출액은 21.7% 증가한 27억5000만달러를 기록하며 수출을 뒷받침했다.
이 같은 시장의 변화 흐름 속에서 한국의 입지는 어떨까.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는 지난 20년간 4배 수준으로 확대됐고, '한국의 주력' 메모리 반도체 시장 규모는 같은 기간 5배 성장했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20년간 지속적으로 성장해왔지만, 글로벌 반도체 시장 규모를 고려하면 여전히 양적·질적인 성장이 필요하다. 시장조사기관 옴디아에 따르면 매출액 기준 한국의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13.2%로 미국 (55.8%)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통계는 TSMC와 같은 파운드리나 ASML과 같은 반도체 장비 기업 매출이 포함되지 않은 수치다. 파운드리·장비 기업을 포함해 세계 증권시장에 상장된 반도체 기업들의 매출을 기준으로 점유율을 다시 비교하면 한국은 9.7%, 미국은 41.4%로 낮아진다. 반면 대만은 21.8%, 중국은 9.2%로 확대된다. 국가별 반도체 기업의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비교해볼 경우에도 한국은 6.6%에 불과한 반면 미국은 61.1%, 대만은 11.9%, 중국은 6.7%를 나타낸다.
우리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주요 경쟁국과의 격차를 줄이고 K반도체의 견실한 성장을 이끌어내기 위해 글로벌 시장 환경 변화에 발맞춘 지원이 필요하다. 한국 정부는 기업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조세특례제한법'을 개정하며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대기업은 15%, 중소기업은 25%로 상향 조정했다.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등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의 민간 투자를 뒷받침하기 위해 전력·용수 공급, 인허가 신속 처리 등도 지원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 각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장의 역할을 강조하던 미국 정부도 자국 내 공급망 확보라는 명분 아래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도 외국 기업의 자국 내 투자 유치를 위해 투자액의 최대 40%를 보조한다.
이 같은 각국의 지원 정책이 자국 내 공급망을 형성하기 위한 투자 유치를 유도하는 효과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미국 정부에 600여 개 기업이 보조금을 신청하고, 일본에 대해 TSMC·마이크론 등 외국 기업들이 투자를 결정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지원 정책의 수준이 국가별로 상이함에 따라 기업이 어느 국가에 투자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이 차이는 투자 기업의 수익성과 직결된다는 점도 중요하다.
한국 기업이 메모리 반도체를 주도하고 대만 TSMC가 파운드리를 주도한 이후 세계 반도체 공급망은 한국·대만의 반도체 제조, 미국의 반도체 설계·장비 산업, 일본의 소재·부품·장비 기업으로 분업화가 이뤄져 왔다. 그러나 세계 각국의 지원책 효과로 한국의 반도체 제조 지위가 흔들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000년대 초반 세계 반도체 산업에서 치킨게임이 진행된 적이 있다. 반도체 기업의 투자 확대가 지속되면서 기업 간 가격 경쟁이 장기간 지속됐다. 한국 기업들은 이 치열한 경쟁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많은 기업이 인수·합병되면서 산업 지도가 바뀐 사례가 있다. 당시에는 세계적으로 정부의 시장 개입과 지원이 제한적이었던 시기였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지금의 정책 환경하에서는 당시보다 높은 차원의 변수와 위험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글로벌 산업 환경에 미칠 영향도 훨씬 더 크다고 평가된다. 우리 반도체 산업은 수출의 20%를 담당하는 주요 산업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다만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최근의 글로벌 정책 환경을 감안할 때 향후에도 지금의 위치를 유지할 것이라는 기대는 신중해야 한다. 우선 기업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땀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좋은 인재를 뽑아 혁신의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 AI 기술의 도래와 활용은 반도체 산업의 수요를 확대하는 기회 요소이지만, 적절히 대응하지 못할 경우 큰 위기로 닥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부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그간 짧은 기간에 많은 지원이 있었다. 다만 우리가 비교할 대상은 과거의 우리가 아니고 현재의 경쟁 국가와 기업이다. 외국이 시장과 산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방향으로 근본적 정책 방향의 전환을 이룬 점을 감안할 때 우리 기업이 외국 기업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쟁하지 않도록 정부에서도 면밀히 검토해주기를 기대한다.
[김정회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근부회장]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이 상황을 설명해 봐”…한소희 올린 ‘칼 든 강아지’, 사연 알아보니 - 매일경제
- 몸값 1조 오타니 아내, ‘4만원’ 가방 들었다…국내서 벌써 품절? - 매일경제
- “월 100만원 국민연금, 70만원만 탈래요”…손해연금 수급자 85만명, 왜? - 매일경제
- 신용점수 900점 김과장도 은행 문턱 걸려…캐피탈사 대출 ‘기웃기웃’ - 매일경제
- “여보, 예금 빼서 ‘여기’ 넣어둘까”…5.7% 금리, 쫄보들도 할만하다는데 - 매일경제
- “7만전자 갇혔다”…삼성전자 주주들 송곳 질문, 한종희 부회장 대답은 - 매일경제
- 한 총리 “2천명 의대 증원은 최소 숫자”…적당히 타협하면 국민 피해” - 매일경제
- “90대 환자 치료하다 20대 의사 감염”…일본에선 처음이라는데 무슨 일 - 매일경제
- “14만 의사 모아 윤 정권 퇴진운동 앞장”…주수호 의협 홍보위원장 주장 - 매일경제
- ‘도쿄 양궁 3관왕’ 안산, 매국노 발언 고소에 사과 “공인 무게감 절감”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