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식물이 잘 자라려면 오후에 강한 빛 있어야
3월 20일은 낮 길이와 밤 길이가 같다는 춘분이다. 실제로는 낮이 12시간 8분으로, 3일 전인 17일 이미 낮 길이와 밤 길이가 역전됐다. 춘분에서 추분까지 반년 동안은 북반구의 낮이 밤보다 길고 이런 조건을 장일(長日)이라고 부른다. 북반구 중위도 지역에서 이 기간은 초봄에서 초가을에 해당한다.
낮 길이 변화는 지구 공전에 따른 현상으로 일정하게 반복되므로 이를 광주기(photoperiod)라고 부른다. 식물은 이 패턴에 적응하는 시스템을 진화시켰다. 특히 춘분과 추분을 전후해 낮과 밤의 길이가 뒤바뀌는 시점은 식물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많은 식물이 이때를 전후해 개화를 비롯해 성장과 노화 등 여러 활동을 시작하거나 멈추는 결정을 내린다. 이때 온도도 주요 변수로 작용한다.
● 개화와 성장에 미치는 빛의 효과 달라
춘분이 지나면서 많은 식물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고 잎을 내놓기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개화 여부는 낮의 길이, 빛이 존재하는 시간이 중요하지 빛의 세기는 관계가 없다. 빛을 감지하는 수용체가 민감해 흐린 빛도 쳐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식물체의 성장은 좀 다르다. 잎이 자라고 새 가지가 나려면 재료와 에너지가 공급돼야 하므로 광합성이 충분히 일어나야 한다. 낮의 길이뿐 아니라 내리쬐는 빛의 세기도 중요하다. 아마도 광합성 활동량은 시간에 따른 빛 세기의 합인 빛의 총량과 비례할 것이고 따라서 식물체의 성장도 그럴 것이다. 과연 그럴까.
식물체의 성장 역시 광주기의 영향을 받는다. 빛이 충분해도 낮이 짧으면 성장이 더디다. 반면 낮이 길어지면 빠르게 성장한다. 보통 실험실에서 장일 조건은 하루에 빛의 세기가 충분한 인공조명 16시간을 켜 낮을 재현하고 단일(短日) 조건은 절반인 8시간 동안 같은 세기의 빛을 비춘다. 성장이 빛의 총량과 정비례한다면 장일 조건에서 생물량 증가 폭이 단일 조건의 2배이겠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크다. 낮이 가장 긴 하지를 전후해 식물체가 가장 왕성하게 자라는 배경이다.
이런 현상은 여러 성장 신호 경로 가운데 영향력이 큰 하나가 낮이 길 때만 스위치가 켜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실체는 모르는 상태였다.
● 오후에 강한 빛 있어야
조슈아 젠드론 미국 예일대 교수팀은 쌍떡잎식물의 모델인 애기장대에서 특이한 돌연변이체를 발견했다. 장일 조건에서도 잎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정상 개체보다 훨씬 작은데도 꽃은 비슷한 시기에 폈다. 개화 신호 경로는 멀쩡하고 성장 신호 경로만 문제가 생긴 것이다.
돌연변이체의 게놈을 분석한 결과 당알코올인 미오이노시톨(myo-inositol)을 만드는 반응을 촉매하는 효소를 지정하는 MIPS1 유전자가 고장난 상태였다. 그 결과 미오이노시톨이 얼마 만들어지지 않아 잎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이다. 미오이노시톨은 세포 분열과 성장, 활력 유지에 필요한 신호분자와 비타민, 세포막 성분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 약방의 감초와 같은 분자다. 돌연변이체에 미오이노시톨을 공급해주자 예상대로 성장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장일 조건에서 식물체가 빠르게 자라는 현상은 낮이 길 때 MIPS1 유전자 활성이 커 미오이노시톨이 많이 만들어진 결과로 보인다. 실제 장일 조건과 단일 조건에서 하루 시간대별 MIPS1 유전자 발현을 비교한 결과 장일 조건 낮의 후반부(오후)에 발현이 높았다.
추가 실험을 통해 연구자들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광합성을 하면 포도당 같은 당 분자가 만들어진다. 단일 조건 또는 장일 조건의 낮 전반부(오전)에 만들어진 당 분자는 주로 녹말로 전환돼 저장되고 장일 조건의 오후에 만들어진 당 분자는 그대로 남아 세포 내 농도가 올라가며 MIPS1 유전자의 발현을 촉진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 많으면 식물이 잘 자라지 않는다. 그렇다면 빛의 세기가 식물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데도 이 경로가 관여하지 않을까. 빛이 약하면 광합성 활동으로 만들어진 당이 적어 세포호흡 등 식물체의 기본 대사를 유지하는 에너지원으로 다 쓰여 MIPS1 유전자 발현을 촉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빛의 세기를 5분의 1 수준으로 줄이자 정상 개체도 돌연변이체처럼 성장 속도가 느려졌다.
흥미롭게도 빛의 총량이 같아도 시간대에 따라 빛의 세기 분포가 다르면 성장 속도가 다르다. 장일 조건에서 오전에 빛이 약하더라도 오후에 충분하면 잘 자라지만 그 반대에서는 성장이 느려진다. 오후에 광합성이 충분히 일어날 때만 MIPS1이 활성화돼 미오이노시톨이 많이 만들어져 성장 모드로 바뀌는 것이다.
이는 식물이 해가 뜬 뒤 일정 시간 동안(단일 또는 장일의 전반부) 만들어진 광합성 산물은 녹말로 바꿔 밤에 쓸 에너지원으로 저장하고 그 뒤(장일의 후반부)의 광합성 산물을 성장에 투자하는 전략을 진화시킨 결과로 보인다.
● 개화는 절대 광주기, 성장은 광합성 주기
이번 발견은 식물의 성장 원리를 밝힌 것뿐 아니라 미래 농업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인공조명을 쓰는 실내농업에서 특정 시간대에만 강한 빛을 쪼여 조명에 드는 에너지를 최소화하면서도 작물 성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애기장대에서 관찰된 현상이 다른 식물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지는 않을 것이므로 작물에 따른 최적 조건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100년 넘게 수많은 과학자가 식물의 광주기를 연구했음에도 성장과 관련한 근본적인 현상이 이제야 발견된 건 뜻밖의 일이다. 광주기가 개화와 성장에 미치는 메커니즘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연구자들은 낮의 길이만 중요할 뿐 빛의 세기는 상관없는 경우를 기존의 광주기에서 '절대 광주기'로 고쳐 불렀고(낮 길이 변화는 지구 공전 궤도에 따라 정해져 있으므로), 광합성 산물이 식물의 세포호흡 요구량을 넘는 세기의 빛이 있는 기간에 '광합성 주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앞으로 식물학 교재 개정판이 나온다면 이번 발견에 대한 설명과 함께 '광합성 주기'라는 용어가 들어가지 않을까.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10권), 《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 《식물은 어떻게 작물이 되었나》가 있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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